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대한항공 최고경영자(CEO) 자리에 오른 지 20년 만에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난다. 회장직 자체는 유지하지만, 실무에 보다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대표이사직에서 내려오면서 대한항공의 향방에 관심이 모인다. 대한항공은 어수선한 분위기를 정리하고 임원진을 중심으로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대한항공은 27일 서울 강서구 공항동 대한항공빌딩 5층 강당에서 제57기 정기 주주총회를 열고, 조 회장의 사내이사 연임안 등 4개 의안을 표결에 부쳤다.
그 결과 조 회장의 사내이사 연임안은 찬성 64.1%, 반대 35.9%로 부결됐다. 연임에 성공하려면 찬성 66.66% 이상이 필요하다. 대한항공은 이날 2.5% 남짓한 지분을 추가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
예상된 결과였다. 2대 주주인 국민연금의 수탁자전문위는 전날인 26일 반대 의결권 행사를 결정했다. 조 회장이 연임할 경우 기업 가치 훼손 내지 주주권 침해의 이력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대한항공 측은 "국민연금의 결정이 매우 유감스럽다. 사법부 판결이 내려지지 않았음에도 '무죄 추정의 원칙'이라는 법적 가치마저 무시하고 내려진 결정"이라며 강도 높게 반발했지만 결과를 바꾸진 못했다.
핵심 관건이었던 외국인 주주와 소액주주도 조 회장에게서 등을 돌렸다. 해외 공적 연기금인 플로리다연금(SBAF) 캐나다연금(CPPIB) 브리티시컬럼비아투자공사(BCI) 등도 의결권 행사 사전 공시를 통해 조 회장 연임에 반대하면서 궁지에 몰렸다.
대한항공 정관은 "사내이사 선임은 주총 참석 주주의 3분의 2 이상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규정한다. 대한항공 주식 지분은 조 회장과 한진칼(29.96%) 등 특수관계인이 33.35%를 보유하고 있고, 2대 주주인 국민연금 지분율은 11.56%다. 외국인 주주 지분율은 20.50%, 기타 주주는 55.09% 등이다. 기타 주주에는 기관과 개인 소액주주 등이 포함돼 있다.
주주총회 분위기도 좋지 않았다. 소액주주들의 성토가 이어지는 가운데 소액주주 의결권을 위임받아 참석한 채이배 바른미래당 의원은 "(오너 일가의 문제로) 대한항공의 평판이 추락하고 경영 실적이 곤두박질쳤다"고 비판했다.
주식시장 역시 요동쳤다. 주주총회 소식이 전해진 오전 10시 반 무렵에는 전일보다 1450원(4.48%) 오른 3만3900원까지 주가가 치솟았다. '조양호 경영권 박탈' 등 단어가 포털 사이트 검색어 상단에 올랐다.
조 회장은 1999년 아버지 고 조중훈 회장에 이어 대한항공 CEO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20년 만에 대한항공 대표이사직을 잃게 되면서 경영하는 데 힘이 빠진 것이 사실이다.
조 회장은 한진그룹 지주사인 한진칼의 대표이사를 맡고 있어 그룹 회장으로 역할은 유지하게 된다.
앞으로 대한항공은 조원태 총괄사장 중심으로 경영이 이뤄질 전망이다. 조 총괄사장의 리더십에 대중의 관심이 쏠릴 것으로 보인다.
대한항공은 대책 마련에 나섰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조 회장이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나지만 회장직은 유지한다. (전부는 아니지만) 경영도 할 수 있다"며 "현재 대응책을 내부 논의 중"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