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유가 배우 이지은의 이름으로 첫 영화 신고식을 치른다. 스스로 브랜드가 된 '아이유의 첫 걸음'은 역시 다르다. 프로젝트 자체가 평범하지 않다. 빵빵한 국내 배급사가 아닌 글로벌 플랫폼을 등에 업었고, 몇 백억대 대작 상업영화가 아닌 '이지은'을 온전히 보여줄 수 있는 단편 영화로 영리한 우회로를 택했다. 가수로서 또 배우로서 쌓아 온 '차근차근'의 미덕은 '페르소나' 프로젝트에서도 어김없이 아이유의 성장 발판으로 활용될 전망이다.
가수 아이유는 이미 톱 오브 톱 위치에 올라 자신의 음악세계를 펼치고 있지만 배우 이지은은 아직 보여준 것보다 보여줄 것이 더 많은 꽃봉오리에 가깝다. 그래서 호기심이 샘솟지만 건드리기는 쉽지 않다. 그런 이지은을 윤종신과 네 명의 감독이 무대 위에 올렸고, 카메라 안에 넣었다. 네 편의 작품에서 이지은이지만 이지은이 아닌 캐릭터들은 이지은의 옷을 입고 이지은의 매력으로 살아 숨쉰다.
넷플릭스(Netflix) 오리지널 시리즈 '페르소나'는 이경미 감독의 '러브 세트', 임필성 감독의 '썩지 않게 아주 오래', ' 전고운 감독의 '키스가 죄', 김종관 감독의 '밤을 걷다'까지 4명의 감독이 페르소나 이지은을 각기 다른 시선으로 풀어낸 총 4개의 단편 영화를 묶은 작품이다. 영화계에 잔뼈가 굵은 네 감독이 본업으로는 이미 출중한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영화계 자체에는 이제 막 발을 들이려는 윤종신을 제작자로, 이지은을 주인공으로 재미있는 프로젝트를 완성했다. 업계의 경계를 허문 콜라보레이션이다.
27일 '페르소나'를 처음 소개하는 제작보고회 자리에서 네 감독의 페르소나로 낙점된 이지은은 "첫 영화라 굉장히 얼떨떨하다. 두근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다렸고, 또 기대했다"며 "4명의 감독님과 작업할 수 있는 기회가 나에게 와 신기했다. 첫 미팅 자리에서 너무 쉽게 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낯가림이 좀 있는 편인데 '벌써 합이 좋다'는 생각을 했다. 감독님들이 다각도로 나를 관찰했고, 난 4가지 캐릭터를 부여 받았다. 단기간에 촬영했지만 즐거웠다. 또 다른 나를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고 자신했다.
이경미 감독의 '러브 세트'는 테니스 코트 위 두 여자의 불꽃 튀는 승부를 담았다. 아빠의 애인을 질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딸 이지은과 호락호락하지 않은 아빠의 애인 배두나가 호흡을 맞췄다. 임필성 감독의 '썩지 않게 아주 오래'는 모든 걸 바칠 만큼 매혹적인 한 여자의 이야기다. 자유분방한 여자 이지은과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그녀 때문에 애태우는 박해수가 신선한 케미를 선보인다. 감독은 아이유의 노래 '잼잼'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후문이다.
전고운 감독의 '키스가 죄'는 키스마크 때문에 아빠한테 머리카락이 잘린 채 집에 갇힌 친구를 구출하는 엉뚱발랄 여고생 이지은의 모습을 그린다. 친구 아빠에게 복수를 계획하는 한나 역의 이지은과 혜복 역의 심달기 케미스트리가 돋보이는 버디물이다. 김종관 감독의 '밤을 걷다'는 이별한 연인과의 슬프고 아름다운 밤 산책을 다룬 낭만적인 스토리다. 이지은은 한 남자의 꿈에 나타난 옛 연인으로 분해 정준원과 함께 연기했다.
작품이 공개되기 전 가장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던 지점은 감독들에게 아이유라는 뮤지션, 그리고 이지은이라는 아티스트는 어떤 인물로 비춰졌냐는 부분이다. 사실 이지은은 그간 여러 번 스크린 문을 두드렸고, 많은 영화 관계자들이 이지은과 함께 하려 준비했지만 여러 이유로 계획이 실행되지는 못했다. 때문에 완성된 '페르소나'와 감독들의 이야기, 그리고 이지은이 경험한 첫 영화 촬영 현장의 느낌은 향후 이지은의 스크린 행보에도 큰 영향을 끼칠 수 밖에 없다.
감독들의 눈에 비친 이지은은 이지은이기도 했고 또 아이유이기도 했다. 공통적인 대목은 존재감이 만만치 않다는 것, 그리고 의외로 제약이 없었다는 지점이다.
"아이유로 인해 이 프로젝트가 시작됐다"고 못 박은 임필성 감독은 "설마 했는데 정말 출연을 결정해줬다. 아이유만큼은 뮤지션을 뛰어넘는 아티스트라 생각한다. 드라마를 봐도 영화적 포텐이 넘치는 배우로 보였다. 좋은 배우들은 많지만 자신의 영역에서 최고 아티스트와 콜라보레이션을 할 수 있다는 건 굉장한 영광이다"고 말했다.
전고운 감독은 "아이유에게 폐가 되지 않는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핵심 포인트였다. 나라면 이런 선택을 하기 힘들었을 것 같다. 아직 검증 안된 신인 감독인데도 흔쾌하게 오케이를 했고, 시나리오를 쓸 때도 신기할만큼 제약이 없었다. 이지은을 만나지 못한 채 글을 먼저 썼는데, 이지은에게 똑똑하고 정의로운 면이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정말 그랬다"고 귀띔했다. 전고운 감독은 현장에서 즉흥적인 감정을 통해 진짜 이지은의 모습을 끄집어내려 노력했다는 후문이다.
김종관 감독 역시 "배우 이지은에게 호기심이 있었다. 이지은에게 많은 모습이 있겠지만 내가 이지은을 처음 만났을 땐 차분하고 나른한 인상이었다. 강한 삶을 사는 사람의 쓸쓸함이 보였다. 그런 부분을 더 깊게 파보고 싶었다. 대화가 잘 통한만큼 준비와 고민을 많이 하더라. 창작자가 방향을 잘 잡을 수 있도록 어떠한 터치도 없었다"고 덧붙였다.
감독들이 습작처럼 쓰는 단편이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껴 '페르소나' 프로젝트를 기획했다는 윤종신은 "단순하게 출발했고, 우연하게 아이유를 떠올렸다"고 강조했다. 우연의 첫 걸음은 늘 기대 이상의 결과를 낳는다. '페르소나'와 이지은의 새로운 얼굴에 거는 기대가 클 수 밖에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