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은행의 맏언니 임영희와 막내 박지현이 선수로 함께하는 마지막 수다를 떨었다. 최근 서울 번동 북서울 꿈의 숲에서 만난 임영희(왼쪽)와 박지현은 "새로운 봄이 찾아올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양광삼 기자
"(임)영희 언니와 한 시즌밖에 뛰지 못해 너무 아쉽지만, 한 시즌도 같이 뛰어 보지 못한 선수도 많은데 저는 영광이었어요(박지현)".
"오히려 내가 지현이라는 선수와 함께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지. 이것도 다 오래 선수 생활을 한 덕분 아니겠니.(웃음)(임영희)"
여자 프로농구 우리은행의 맏언니 임영희(39)와 막내 박지현(19)이 선수로 함께하는 마지막 수다를 떨었다. 올 시즌을 끝으로 은퇴하는 임영희는 20년 동안 코트를 지키며 사상 첫 정규 리그 600경기 출전 등 금자탑을 쌓은 살아 있는 전설이다.
위성우 감독과 2012~2018년까지 우리은행의 통합 우승 6연패를 이끌었다. 2012~2013시즌 정규 리그와 챔피언결정전 최우수선수(MVP)를 모두 휩쓸었고, 2013~2014시즌엔 챔피언결정전 MVP로 뽑혔다. 그는 마지막 시즌에도 평균 30분 가까이 출전하며 10.5득점 3.6어시스트 3.3리바운드를 기록하는 특급 활약을 펼쳤지만, 박수받을 때 떠나기로 결심했다.
임영희가 마지막 불꽃을 붙태우는 사이 이제 막 고교를 졸업한 겁 없는 신예가 프로의 문을 열어젖혔다. 2000년생 박지현은 우리은행 입단 과정부터 극적이었다. 이미 고교 시절부터 성인 국가대표에 선발된 박지현은 신인 드래프트 전체 1순위였다. 모든 팀들이 군침을 흘리는 가운데 박지현은 4.8%라는 가장 낮은 확률을 뚫고 우리은행 유니폼을 입었다. 박지현은 쟁쟁한 언니들 사이에서도 정규 리그 15경기 평균 19분6초를 뛰며 8득점 3.7리바운드 1.7어시스트를 올려 신인상까지 거머쥐었다.
우리은행은 올 시즌 7년 만에 챔피언결정전에 오르지 못하며 '우리왕조'를 마감했지만, 임영희 코치와 차기 에이스 박지현 중심으로 이어질 세대교체에 벌써부터 큰 관심이 쏠린다. 최근 서울 번동 북서울 꿈의숲에서 만난 임영희와 박지현은 "매년 찾아오는 봄처럼 우리은행의 겨울에도 금세 봄이 찾아올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봄이 성큼 다가온 산책로에 선 둘은 스무살 나이 차를 잊은 듯 깔깔대며 수다를 떨었다.
- 평생 기억에 남을 시즌을 마친 소감은. 박지현(이하 박)= "생애 첫 프로 데뷔전은 지금 생각해도 가장 신기한 경험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꿈꿨던 무대에서 막상 뛰게 되니, 경기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만큼 빨리 지나가더라. 정규 리그 15경기를 뛰었는데, 한 경기 한 경기 다 기억난다. 짧았지만 강렬한 시즌으로 기억될 것 같다."
임영희(이하 임)=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1년이다. 선수로 마지막 시즌이었다는 점도 있지만, 챔피언결정전에 올라가지 못한 아쉬움 때문에 쉽게 잊히지 않을 것 같다. 600경기 출전 달성도 뿌듯하다."
- 신인이라서 유독 더 아쉬운 게 많은 것 같다. 박= "코트에서 가진 것을 다 보여 주지 못했다. 신인답게 더 자신 있고 패기 있게 뛰었어야 했다. 무엇보다 팀 성적에 도움이 되고 싶었는데, 챔피언결정전에 오르지 못했다. 올 시즌을 앞으로 더 발전하는 계기로 삼겠다."
선수로 마지막 시즌을 마친 임영희. WKBL 제공
- 선수 임영희로는 마지막 시즌이었다. 7년 만에 통합 우승을 이루지 못한 시점이기도 하다. 임= "지현이가 없는 상태에서 은퇴해야 했다면 신경이 많이 쓰였을 것이다. 불안한 마음은 없다. 물론 조금 걱정된다. 나 없이 (김)정은이와 (박)혜진이를 비롯한 기존 선수들이 새 선수들과 손발을 빠르게 맞출 수 있으면 좋겠다."
-박지현이 믿음직스로운 이유는. 임= "여자 농구에서 신입 선수가 게임을 뛰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국민은행 박지수의 경우는 워낙 신장과 힘이 압도적이라 비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지현이는 외곽 플레이어인데 부담 없이 하더라. 어떤 팀에 가더라도 주전으로 뛸 수 있는 실력을 가졌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임영희는 박지현이 어느 팀에 가더라도 주전에 뛸 실력이라며 칭찬했다. WKBL 제공
- 하필 박지현이 들어온 해에 연속 통합 우승 기록이 끊겼다. 박= "공교롭게도 프로 데뷔전도 졌고, 그 다음 경기도 졌다. 내가 들어오고 2연패한 것이다. 게다가 우승은커녕 챔피언결정전에 오르지도 못했다. '나 때문인가'라는 생각도 해 봤다. 다행히 그런 생각을 할 때 언니들이 '네 잘못이 아니다. 언니들이 못해서 졌다'라고 다독여 주셨다."
임= "지현이가 아니라 누가 들어와도 '내 탓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수 있는 시즌이었다. 지현이는 기량이 뛰어난 선수지만, 우리은행처럼 오랜 세월에 걸쳐 전력이 완성된 팀은 선수 한 명 때문에 이기고 지는 일은 없다. 팀 성적이 지현이 탓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나는 지현이가 우리팀에 올 수 있어 복 받은 시즌이라고 생각한다. 우승을 놓친 건 지현이를 뽑을 때 행운을 다 써 버려서가 아닐까.(웃음)"
- 임영희는 어떤 선배인가. 박= "먼저 다가와 주시는 분이다. 고민이 있을 때 먼저 아시고 찾아오셔서 '잘하고 있다' '이건 이래서 못한 거다' 등을 먼저 얘기해 주신다. 플레이오프 1차전 끝나고 이동 중 받은 문자 메시지는 잊지 못할 것 같다. 영희 언니가 '힘든 건 언니들이 할 테니 부담 갖지 말고, 지금은 하고 싶은 대로 너가 잘하는 플레이를 해'라고 조언과 격려를 장문으로 보내 주셨다. 언니의 배려에 감동했다."
박지현에게 임영희는 맏언니 그 이상의 존재다. 양광삼 기자
- 후배의 고민을 알아채는 방법은. 임= "눈치 챌 필요가 있나. 감독님한테 지적당하거나 혼난 지현이는 시무룩한 게 얼굴에 다 드러난다. 우리 눈에는 어떤 상황 때문에 혼났을 것이라는 게 보이니, 후배가 기 죽지 않게 장난도 치고 격려도 해 주면서 풀어 준다. 지현이는 고교 시절 많이 혼나면서 운동한 적이 없기 때문에 감독님이 프로 세계에 적응하라는 뜻에서 일부러 소리도 더 크게 지르신 것 같다. 처음엔 감독님 소리에 놀라서 울고 그랬는데, 지금은 팀 분위기에 잘 녹아들었다."
-후배들 중 박지현에게 더 관심이 가는 편인가. 임= "막내라서 더 신경 쓰인다. 무엇보다 지현이는 이 팀의 주축으로 뛸 선수가 아닌가. 게다가 지독한 연습벌레다. 입단 초기 외곽슛이 약점이라고 생각했는데, 매일 오전과 오후 운동을 앞두고 1시간 먼저 나와 개인 슛 연습을 하더라. 그 노력이 시즌이 지나면서 눈에 보였는데, 약점을 보완하려는 열정이 좋아 보였다. 이런 후배를 싫어할 수 있나.(웃음)" - 맏언니는 외롭겠다 임= "천만의 말씀. 나도 후배들한테 기를 받는다. 내가 감독님한테 혼나는 날이면, 지현이를 비롯해 후배들이 '언니 힘내요'라고 문자를 차례로 보낸다. 서로를 챙기면서 힘도 얻고 위로도 받는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세대 차이는 존재하기 마련. 박지현은 임영희 선수의 나이가 믿기지 않으면서도, SNS나 대화할 때 조금씩 차이를 느낀다. 양광삼 기자
-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세대 차이는 있다. 박= "영희 언니가 마흔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코트에선 언니의 나이를 전혀 느낄 수 없다. 다만 SNS 사용법을 모르고 신기해할 때나, 요즘 어린 선수들이 쓰는 '급식체(급식 먹는 10대의 은어)'를 귀엽게 봐주실 때 나이 차이를 조금 느낀다.(웃음)"
임= "내 신인 시절과 요즘 어린 선수들의 사고방식은 다르다. 급식체는 같이 지내다 보면 그래도 어느 정도는 알아듣는다. 하지만 요즘 가수들과 노래는 극복이 안 되는 부분이다. 회식이나 뒤풀이 때 노래방에 가면 30대 이상 선수들은 '무슨 노래야. 흥이 나질 않아'라는 말이 나올 선곡을 하더라. SNS는 팔로하는 법을 몰라 후배들에게 휴대전화를 맡겨서 대신 '맞팔(서로 팔로)'하게 한 뒤 돌려받았다.(웃음)"
박= "다 그런 건 아니다. 혜진 언니, 그러니까 혜진이도 노력을 많이 하시지만 아무래도 30대 언니들부터는 살짝 세대 차이를….(웃음)"
- 박지현은 아직 우리은행의 악명 높은 비시즌을 겪어 보지 못했다. 박= "언니들은 무섭다고 한다. 다들 한숨 쉬더라."
임= "아무리 힘들 거라고 말해 줘도 몸에 와닿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팀 훈련은 몸이 겪어 봐야 안다.(웃음) 답은 그냥 휴가 동안 푹 쉬고, 이후 '나 죽었소'라는 마음으로 하는 게 마음 편하다.(웃음) 그나마 다행인 점 하나는 감독님이 처음 오신 6~7년 전과 훈련 강도가 많이 달라졌다는 것이다.(웃음)"
2017~2018시즌 우승 당시 환호하는 우리은행 선수단의 모습. IS포토
- 내가 터득한 '위성우 감독 사용법'은. 박= "잘 모르겠다.(웃음) 정말 솔직히 얘기하면, 우리은행 입단 전에 본 감독님은 코트 안에서 멋졌다. 밖에서 만나면 되게 자상하게 웃으시는, 미소가 따뜻한 분이었다. 그런 모습에 속았다.(웃음) 신인 드래프트장에서도 무척 자상하셨는데, 우리은행에 들어오고 이틀이 지나면서 달라지셨다.(웃음) 아직 본모습을 다 보여 주신 건 아닌 것 같다. 그럼에도 정말 많이 혼나고 있다. 다 내가 못해서 더 잘하라는 마음으로 그러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도 우리 감독님은 상상 이상으로 호랑이 감독님이라는 말은 남기겠다.(웃음)"
임= "정말 오래 위 감독님과 함께했지만, 사용법은 없는 것 같다.(웃음) 우리가 감독님이 원하고 좋아하는 스타일을 빨리 파악하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이다.(웃음) 지현이도 그런 부분을 빨리 터득하는 게 덜 혼나고 프로에 빨리 적응하는 지름길이다. 힘들겠지만, 위 감독님은 피하려고 하면 안 되고 정면으로 받아들여야 한다.(웃음)"
- 지도자의 길을 걷게 되면서 걱정도 많을 텐데. 임= "일단 후배들한테 '언니를 코치로 부르지 마라'고 얘기하긴 했다. 물론 그렇게 안 될 수도 있겠지만, '10년을 선수로 같이 한솥밥을 먹던 후배들이 낯설어할까 봐' 하는 마음이 앞선다. 함께 힘든 시절을 보내며 쌓은 공감대가 한순간에 없어질 것 같아 걱정이다. 정은이와 혜진이와 서먹서먹해질까 봐 걱정스럽다. 감독님과 전주원 코치님께도 내 고민을 말씀드렸다. 전 코치님은 선수들도 거리감 없이 잘 받아들이고 괜찮을 것이라고 말해 주셨다."
- 앞으로 보좌하게 될 위 감독에게 한마디 한다면. 임= "선수 생활을 하는 내내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없는 것 같다. 지금 내가 하는 말도 신문 기사를 통해 전해지겠지만, '감독님을 만났기 때문에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 좋은 상황에서 은퇴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코치로도 많이 보고 배우면서 잘 보필하겠다."
코치 임영희는 박지현과 함께 다시 한 번 우리은행왕조를 꿈꾼다. 양광삼 기자
- 레전드 임영희 코치와 에이스 박지현이 만들어 갈 우리은행이 기대된다. 박= "언니가 마음 편할 수 있도록, 내가 그 빈자리를 잘 채우겠다. 정은 언니와 헤진 언니 등과 함께 내년엔 다시 챔피언결정전에 나가겠다. 우리왕조를 재건하고 싶다."
임= "잘할 거라고 믿는다. 지현이도 정은이와 혜진이의 플레이 스타일에 대한 감을 잡았을 것이다. 옆에서 잘 도와주겠다. 무엇보다 우리는 팀으로 다시 올라가는 단계다. 코치로 다시 한 번 우승 트로피를 들어 보고 싶다. 지현이와 함께 다시 한 번 '우리(은행)왕조'를 여는 꿈을 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