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고조선 논쟁’으로 유명한 유정희(남, 37, 역사학자/고고학자 : 『18세기 프랑스 지식인이 쓴 고조선, 고구려의 역사』, 『하왕조 신화의 장막을 걷고 역사의 무대로』, 『드래곤볼 일본 제국주의를 말하다』, 『그레이스 켈리와 유럽 모나코 왕국 이야기』, 『18세기 프랑스 지식인이 본 조선왕조』 등 저/감수) 선생이 직접 쓴 [특별기획 칼럼 ①부]이다.
지난주부터 드라마 ‘아스달 연대기’가 한창 방영 중이다. 시청 후 이런저런 의견 다 있다지만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드라마를 섣불리 판단하는 건 다소 그렇다고 생각하고 도리어 흥미로운 부분이 많다고 생각된다.
한 명의 역사학자 겸 고고학자로서 시청하면 할수록 항상 흥미로운 것들이 눈에 많이 띈다. 그중에서도 단연 필자의 눈을 사로잡는 것은 건축물, 곧 수뇌부들이 집회를 하는 성벽같이 보이는 구조물과 성(城)으로 보이는 건축물일 것이다.
당연 전공자나 일부 역사학계에서는 또 말들이 많다. 당시 저 시대에 저것이 가능한가 아닌가에 대해서! 그러나 드라마는 일단 드라마로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일일이 그런 것까지 다 고려하면 어떻게 드라마가 만들어 질 수 있는가.
그래서 이러한 의문에 대한 왈가왈부 자체가 크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래도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많기에 사가(史家)로서 필자의 의견을 말하자면 일단 ‘가능할 것 같다.(It was probable.)’이다. 언뜻 눈으로 보기에 저 시기 성벽은 고대(古代)를 넘어 중세(中世) 시기 정도의 성벽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드라마이고 극적인 재미나 가시적인 효과를 위해 과장이 없다고 할 순 없지만, ‘아스달 연대기’의 성벽이나 성(城)은 절대 불가능하지 않다. 100%는 확실한 답은 아니지만 우리는 사실 그에 대한 어느 정도 가시권 안에 있는 해답을 이미 가지고 있다. 곧, 스마오 유적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지금으로부터 4000년전 쯤 곧 고서(古書)상 중국 순(舜)임금에서 하(夏)나라 초기로 넘어가는 시기나 늦어도 하(夏)나라 초중기의 유적으로 추정되는 중국 섬서성 신목현(神木縣) 스마오(석묘) 유적을 보면 그 답이 보인다. 이 성(城)은 이미 왕성(王城: royal palace)을 중심으로 귀족, 일반민, 노예 등지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성의 구조를 보여준다.
물론 스마오는 좀 더 깊이 있는 발굴조사가 필요하기에 지금 확실히 어떠하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그러나 스마오 유적은 연대상 드라마 ‘아스달 연대기’의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사실 스마오 유적은 우리 것이 아닌 중국의 것이지만, 이것만큼 ‘아스달 연대기’의 시대를 잘 보여주는 유적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이웃나라인 중국이 이 정도 되니까 우리도 그에 엇비슷한 문명 정도는 있었을 것이다. 물론 현재는 확실한 고고학적 증거가 없어 말을 못하지만, 스마오 유적도 당시 중국의 수많은 ‘초기 읍제국가(굳이 서구와 비교하자면 city-state와 엇비슷한)’ 중 하나였음을 상기했을 때 그러한 문명이 중국만 있었을리는 단연 만무하고, 고조선의 주무대인 요서나 요동, 아니면 한반도 북부지역도 이와 엇비슷한 문명을 한번 생각해 볼 여지는 있다.
물론 고조선이나 선(先)고조선 문명으로 추정되는 것들이 중국의 그것 보다는 정황상 규모나 발전도가 다소 미흡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동(同)시기 중국에도 존재했던 초기 읍제국가들이 고조선의 주무대에서는 무조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소 어폐가 있을 것이다.
덧붙여 ‘아스달 연대기’에 나오는 그 정도의 성이나 성벽이 가능하다면 아시아에서 완전한 국가의 성립으로 볼 수 있는 유적은 어떤 것이고 시기상 언제쯤일지 궁금해하시는 분도 있을 것 같아 조금 부연한다.
스마오 유적보다 연대는 수백년 후대지만 동아시아에서 현재까지 발굴된 가장 완벽한 국가(state) 단계의 유적은 바로 지금으로부터 3천5~6백년 전의 중국의 하남(河南, Henan) 언사(偃師, Yanshi) 이리두(二里頭, Erlitou) 만기(晩期) 유적이다.
하말(夏末)의 수도로 유추되는 이 이리두 유적은 크게 조기(早期)와 만기(晩期)로 나눠지는데, 만기에서 발굴된 궁전 유적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규모이다.
[1] 이리두 1호 궁전만 하더라도 정방형의 한 면이 대략 100m 가량이다. 이밖에 2호 궁전도 있고 또 다른 궁전도 발굴된 게 있고 지금도 수십년 동안 끝없이 발굴중이니 이리두 유적의 그것은 확실히 국가단계이다.
[2] 필자가 작년 해제하고 사료 교차검증, 사료 상호보완한 <레지 고조선 사료: 일명 ‘레지 사료’ - regis’s historical records on old joseon: rhroj> 를 보면 분명 고조선(Coree로 표기)이 중국 요(堯)임금 시기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고 쓰여져 있다. 물론 그것이 당시 무조건 국가(state) 단계로 보기에는 좀 더 확실한 고증이나 확인이 필요하지만, 늦어도 하(夏)나라 초기나 중기에는 국가단계의 그 무엇을 만들었음을 쉽게 유추해 볼 수 있다.
[3] 그런 측면에서 ‘아스달 연대기’의 성(城) 등은 무조건 불가능한 환상 속의 성(城)이 아니라, 우리가 스마오 유적에서 본 것처럼 충분히 가능한 그 무엇이 아닌가 한다. 곧, 이는 다소 유현(幽玄)한 문제이긴 하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가 많은 그 무엇인 것 같다.
1) 이리두 유적과 그 전 시기의 중국 고고학의 흐름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소 오래된 책이긴 하지만 다음의 연구성과를 참고하기 바란다. K. C. Chang,
The Archaeology of Ancient China, New Haven, CT: Yale University Press, 1963.
2) 유정희, 『하왕조 신화의 장막을 걷고 역사의 무대로』, 아이네아스, 2016.
3) 쟝 밥티스트 레지(유정희 해제), 『18세기 프랑스 지식인이 쓴 고조선, 고구려의 역사』, 아이네아스, 2018. 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