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의 거리감은 쉬이 좁혀지지 않겠지만, 요즘은 가까이서 예술을 접할 수 있는 곳들이 많아 맘만 먹으면 예술에 한발 다가가기가 어렵지 않다.
서울은 특히 각종 전시나 공연 등이 수두룩한데, 최근에는 전시에서 작품에 대한 설명을 스마트폰 앱을 다운받아 들을 수도 있고 도슨트(해설사) 투어도 시간대별로 잘 마련돼 있어 예술을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어졌다.
수도권은 물론이고, 지방에서도 ‘예술’을 몸소 즐길 수 있는 곳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작가가 빚어 낸 유일의 작품을 즐길 수 있는 특별한 곳들이다.
아직 입소문이 나지 않은 예술 관광지,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곳들을 한국관광공사와 함께 알아봤다.
옛 공장을 ‘예술’로 만들어 낸 곳, 전주 ‘팔복예술공장’
먼저 ‘한옥마을’이 대표 관광지로 꼽히는 전라북도 전주의 ‘팔복예술공장’이다.
팔복예술공장 가는 길은 북전주선 철도와 나란하다. 철도 주변에 이팝나무가 늘어서 5월이면 꽃놀이하러 오는 이가 많고, 6월에는 풍성한 초록이 대신한다.
이팝나무 푸른 길을 500m 남짓 걸으면, 팔복예술공장을 알리는 녹슨 원기둥이 보인다. 뒤쪽에는 옛 공장 이름 ‘쏘렉스’가 적힌 굴뚝이 있다. 과거와 현재가 겹치는 장면이다.
팔복이라는 이름은 여덟 선비가 과거에 급제한 터라 이름 붙은 ‘팔과정’, 일대를 대표하는 마을 ‘신복리’에서 따왔다.
이곳은 1979년 카세트테이프를 만드는 공장으로 문을 열었다. 카세트테이프를 생산했으니 ‘예술 공장’인 셈이다. 카세트테이프 공장은 호황을 누리다가 1980년대 말 CD가 나오면서 위기를 맞았다. 회사는 1987년 노조와 임금 협상 과정에서 공장을 폐쇄했고, 결국 1991년 문을 닫았다.
25년 동안 방치돼 온 공장은 2016년 문화체육관광부 ‘산업 단지 및 폐산업 시설 문화 재생 사업’에 선정돼 기지개를 켜고, 2년 가까운 준비 기간을 거쳤다.
밖에서 보면 공장과 예술, 두 가지 면이 드러난다. 공장은 옛 건물의 나이테를 잃지 않았고, 예술은 그 외관에 제 개성을 발휘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예술과 공장, 오래된 흔적과 새것이 어우러진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깨진 벽이나 벗겨진 페인트와 비디오아트 작품이 대비된다. 그라피티와 낙서도 옛것과 새것의 가교인 듯하다. 로비 오른쪽에는 요즘 유행하는 인더스트리얼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카페 ‘써니’가 있다. 자연스레 2011년 개봉한 영화 ‘써니’가 떠오르는 곳이기도 하다. 카페 써니는 카세트테이프를 만들던 ‘썬전자’와 노동자 소식지 ‘햇살’에서 따온 이름이다.
카페 안에는 탁영환 작가가 디자인한 ‘써니’가 있다. 청바지에 초록색 두건 차림의 여공이 떠오르는 작품이다.
전시 관람이 목적일 때는 2층부터 들러도 좋다. 세 개로 나뉜 전시장이 동선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동시대 예술의 실험과 창작’이라는 팔복예술공장의 비전이 담긴 작품을 주로 전시한다.
남쪽 문으로 나가면 작품이 더 있다. 옛 건물의 주인이던 공장 노동자의 삶의 녹아 있는 작품이다.
먼저 문이 없는 화장실이 전시장이다. 실제 사용하던 화장실로 변기마다 카세트테이프, 케이스에서 분리된 테이프 등이 가득하다. 유진숙 작가의 ‘하루’라는 작품이다. 당시 여직원은 약 400명인데, 건물 내 여자 화장실의 변기는 네 칸뿐이었다. 화장실 옆 벽에는 ‘예쁘게 빛나던 불빛, 공장의 불빛’으로 시작하는 가수 김민기의 ‘공장의 불빛’ 노랫말이 적혔다.
계단을 올라 3층 옥상까지 다녀올 수도 있다. 계단 벽에 박방영 작가의 그림이 마치 카세트테이프처럼 이어진다. 1층 입구 옆 외벽 철제 대문에도 그의 작품이 있다. 옥상은 인근 공장 지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팔복예술공장 관람은 무료이며, 관람 시간은 오전 10시~오후 6시다.
폐허에서 탈바꿈, 대구 ‘수창청춘맨숀’
대구 ‘수창청춘맨숀’은 1976년부터 연초제조창 사택으로 사용됐던 곳이 재탄생한 공간이다. 오래된 아파트에 새 생명을 불어넣은 것이다.
이곳은 1996년 이후 20년 넘게 방치되다가, 역시 문체부 문화 재생 사업에 선정되면서 2017년 12월 문화·예술 공간 ‘수창청춘맨숀’으로 공식 개관했다.
연초제조창 사택으로 쓰인 A~B동은 리모델링해서 복합 예술 공간으로 거듭났다.
A동 1층은 복합 커뮤니티 공간으로 북 카페·아트 숍·무인 카페가 자리한다. 내부에는 ‘안녕 수창, 안녕 청춘’이 새겨진 네온이 반갑게 맞이하고, 커다란 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이 고즈넉하다. 계단을 올라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전시실이다. 어느 집의 거실·안방·화장실이었을 법한 곳이 모두 전시 공간이 됐다. 수창청춘맨숀은 거의 손 대지 않아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을씨년스러운 건물 외부는 베란다 난간 크기에 맞게 시각예술 작품을 걸었고, 계단과 복도의 우편함, 전등 스위치 등에도 설치미술 작품으로 꾸몄다. A동과 B동으로 나뉘지만 정해진 동선은 없다. 어디든 문을 열고 들어가면 작품이 있고, 눈이 가는 곳마다 전시된 작품을 찾는 재미도 쏠쏠하다.
수창청춘맨숀에서는 이달 말까지 청년 예술가 20명이 참여한 기획전 ‘청춘! 아팝트(Ah, popped)’가 열린다. 아파트라는 공간적 특성에 ‘popped(톡톡 튀다)’를 붙인 이름이다.
멋진 구두 위에 침처럼 촘촘히 붙은 인간 군상을 담은 작품, 물질만능주의에 물든 피노키오와 뽀빠이·호빵맨을 표현한 작품, 우기라는 독특한 캐릭터로 만든 작품 등 젊은 작가의 창의적이고 개성이 통통 튀는 작품이 전시된다.
연초제조창 사택 이야기도 있다. 당시 이곳에 근무한 사람들의 이야기와 추억이 담긴 공간이다. 연초제조창이 있던 곳인 만큼 환희·솔·거북선·88 등 담뱃갑을 종류별로 모아 놓은 액자가 인상적이다.
수창청춘맨숀의 대표적인 프로그램은 ‘수창청춘극장’이다. 극장은 청년 예술가와 관객이 어우러지는 공간에서 진행하는 실험적인 프로그램으로, 공연장이 따로 없다. 화장실이 무대면 거실은 객석이 되고, 아파트 앞마당이 무대면 테라스가 객석이 된다. 매주 토요일 오후 4시에 공연한다.
수창청춘맨숀은 무료며, 관람 시간은 오전 10시~오후 7시, 월요일과 명절 당일에 휴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