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민 키움 히어로즈 이사회 의장이 지난 2월 미국 애리조나주 피오리아 스포츠 컴플렉스에 꾸려진 키움 히어로즈의 스프링캠프에서 청백전 투수로 나서 공을 던지고 있다. 연합뉴스 제공 키움 히어로즈는 여전히 바람 잘 날이 없다. 허민(43) 키움 히어로즈 이사회 의장이 부적절한 처신으로 논란에 휩싸였다.
상황은 이렇다. 허 의장은 지난 2일 고양 히어로즈(키움 2군)가 둥지를 틀고 있는 고양국가대표야구훈련장을 방문했다. 퓨처스리그 경기가 열리지 않은 날이라 선수들은 일정상 오전 훈련을 마친 뒤 퇴근하기로 돼 있었다. 하지만 내야수 김은성(26)과 외야수 예진원(20)은 숙소로 돌아가지 않고 야구장에 남았다. '투수'로 나선 허 의장의 공을 타석에서 쳐 보기 위해서였다.
허 의장은 유니폼까지 입고 마운드에 올라 포수를 앉혀 놓고 공을 던지기 시작했다. 일과 외 시간에 구단 운영자가 팀 훈련장에서 소속 선수들을 불러 놓고 함께 야구 하는 장면이 연출됐다. 다른 어느 프로 구단에서도 볼 수 없는 촌극이다. 구단 소속 선수들을 개인 훈련 상대로 이용한 셈이다.
강태화 키움 홍보·마케팅 상무는 이와 관련해 "야구를 하기 위한 방문은 아니었다. 허 의장이 2군 운영 현황을 보고 싶다고 하셔서 지난달 중순부터 2군 감독·운영팀장과 방문 일정을 조율했다. 실제로 당일 감독과 일부 선수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고충도 들었다"고 선을 그었다. 다만 "허 의장이 국내에서 접하기 쉽지 않은 너클볼을 던지시지 않나. 2군 타자들이 한 번 경험해 보면 어떨까 해서 타자들에게 의사를 물었고, 김은성과 예진원이 '한번 해 보고 싶다'고 자발적으로 나서서 자리를 마련했다"며 "다른 선수들의 훈련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 훈련 스케줄이 모두 끝난 뒤 진행했다"고 해명했다.
이어 "그 후 외야수 박정음도 추가로 참여 의사를 밝혔고, 김태완 퓨처스 코치 역시 '나도 너클볼을 경험해 보고 싶다'고 해서 코치와 선수를 포함한 네 명이 참여했다"며 "약 20~25분 야구를 하고 마무리했다.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앞으로는 허 의장이 키움 선수들과 함께 야구 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허 의장은 성공한 벤처 사업가지만, 오랜 기간 야구선수를 꿈꿔 온 야구광이기도 하다. 전설적인 너클볼 투수 필 니크로를 찾아가 너클볼을 직접 배운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2012년 미국 프로야구 시애틀 입단 테스트를 받았고, 2013년부터 3년간 미국 독립리그 록랜드 볼더스에서 선수로 뛰었다. 2011년 한국 최초 독립구단 고양 원더스를 창단해 4년간 운영한 경력도 있다. 이장석 전 대표이사의 영구 실격 이후 야구계에 영향력을 행사할 만한 인물을 찾던 키움은 지난해 말 허 의장을 사외이사로 영입해 팀을 꾸려 갈 새 동력을 마련했다.
하지만 허 의장이 키움 구단 운영에 관여하게 된 것과 키움 타자들을 상대로 공을 던지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허 의장은 평범한 사람들보다 야구를 잘하고 좋아하는 '아마추어'일 뿐이다. 허 의장의 너클볼을 쳐 보는 것이 야구를 직업으로 삼고 있는 '프로' 선수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 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무엇보다 허 의장은 지난 2월 스프링캠프에서도 비슷한 월권을 행사해 빈축을 샀다. 키움 선수들이 두 팀으로 나눠 치른 자체 평가전에서 원정팀 선발투수로 마운드에 올라 '2이닝 3피안타 2볼넷 무실점'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아마추어인 허 의장이 박병호·서건창·김하성·이정후처럼 내로라하는 리그 정상급 타자들을 상대로 공을 던졌다.
키움 구단은 이 부분에 대해서도 "구단이 요청했고, 허 의장이 몇 번이나 고사하다가 마지못해 받아들였다"고 거듭 해명했다. "선수단 사기 진작을 위해 캠프지 방문을 부탁드렸다가 이벤트성으로 한번 경기해 보면 재밌겠다고 판단했다"며 "허 의장 본인도 독립 구단을 운영해 봤기에 구단 제안을 거절했지만, 팀에서 재차 부탁해 어렵게 수락했다"고 부연 설명했다. '하는 수 없이' 마운드에 올랐다는 허 의장은 "한 달간 몸을 만들어 등판을 준비"했고, "서건창을 삼진으로 잡으려 한 게 내 잘못"이라며 경기 내용을 복기했다.
KBO 리그는 철저한 '프로'의 세계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이 한 해에 수백억원을 투자해 가며 야구단을 운영하고, 각 팀의 간판선수들은 수십억원에 달하는 연봉을 받아 가며 그라운드에 나선다. 현장과 프런트는 서로의 영역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존중하면서 각자 전문 분야 역량을 키우기 위해 애쓴다. 과거 한 구단 단장이 선수들 훈련에 앞서 1군 선수들과 캐치볼을 하다가 비난을 한 몸에 받은 이유기도 하다.
하지만 히어로즈가 이런 '프로'야구의 무게를 제대로 느끼고 있는지는 확신하기 어렵다. 전임 대표이사가 구단 재산을 남몰래 쥐락펴락하다가 퇴출된 뒤, 키움이 "팀을 혁신하겠다"며 영입한 인물은 임은주 전 프로축구 FC 안양 단장이다. 축구인 출신이라는 점은 오히려 중요하지 않았다. K-리그에서 각종 비리 연루 의혹을 받았던 인물이라는 게 진짜 문제였다. 결국 임 전 단장은 축구 단장 시절 받았던 의혹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일주일 만에 키움 단장직에서 물러났다. 단, 키움에서 퇴사한 것은 아니다. 현재 구단에서 '부사장' 직함을 달고 있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여기에 키움의 주요 안건을 결정하고 집행해야 할 허민 의장은 '과한 야구 사랑' 탓에 물의를 일으켰다. 야구 규약을 어기거나 법에 저촉된 행위를 한 것은 아니지만, 구단의 얼굴이자 의사 결정권자인 자신의 위치를 너무 안일하게 활용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구단주의 야구 사랑은 지나친 것보다 모자란 게 낫다'는 속설은 과거 여러 사례를 통해 입증됐다.
수십 명의 '프로' 선수들로 구성된 구단을 무사히 꾸려 나가려면, 그들도 그 분야에서 '프로'가 돼야 한다. 키움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은 자신의 본분에 충실하면서 훌륭한 성과를 내고 있지만, 프런트는 현장에서 쌓아 올린 명예를 스스로 깎아내리느라 바쁘다. 허 의장의 라이브피칭이 잘못인지 아닌지는 이미 핵심이 아니다. '프로야구단'이 프로와 아마추어의 가치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