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진(본명 김남진·73)을 빼놓고 어찌 대한민국 가요사를 논할 수 있겠는가. 1960~70년대 최초의 '오빠부대'를 몰고 다니며 당대 최고의 슈퍼스타로 군림한 그는 데뷔 55주년을 맞은 현재까지도 활발히 활동하는 살아있는 전설이다. 전설의 진면목은 넘치는 흥이다. 노래 이야기만 나오면 밥상을 드럼삼아 쿵짝쿵짝 리듬을 치며 노래들을 한 소절씩 불렀다. 핸드폰을 꺼내 다운받은 노래방 어플을 보여주며 "요즘은 언제 어디서나 노래할 수 있다"는 모습이 천생 가수였다. 어쩌다 필자는 올드팝 '오, 캐롤'부터 히트곡 '빈잔'까지 남진의 미니콘서트를 대낮에 자택 근처 한식당에서 관람할 수 있는 영광을 누렸다. 취중 공연은 아니었다. 술을 잘 마시지 않는 남진은 맥주 한 잔을 따라 한 두모금 홀짝였을 뿐이다. 본인은 마시지 않더라도 흔쾌히 잔을 부딪히는 매너는 전설의 품격을 느낄 수 있게 했다. 반세기 이상을 스타로 살아온 남진은 몸에 밴 배려와 존중으로 스스로의 가치를 더욱 높였다. "나잇값을 하고 살아야제"라는 철언으로 모두를 수긍하게 했다. 술을 좋아하지 않는 남진이지만 취중토크에 직접 나선 까닭은 후배들 때문이다. 데뷔 55주년 기념앨범에 이자연, 설운도, 진성, 장윤정, 김종서, 박미경, 서문탁, 박승화, 강인봉, 김승기, 김광진, 육중완밴드, 알리 등 노래 잘하는 후배들이 총출동해 남진의 히트곡을 재해석한다. 7월부터 디지털 싱글 형식으로 발매되며 추후 노래들을 묶어 LP 1000장·CD 3000장으로 제작된다. 앨범 커버는 이성근 화백이 그리고, 수익금은 전액 전남 고흥군에 짓는 남진가요기념관에 기부된다. 남진은 "후배들이 이리 나서주니 얼마나 고맙소"라며 잔을 부딪혔다.
-'미스트롯' 섭외를 거절하셨다고요. "처음 섭외왔을 때 망설였어요. 젊을 때야 제안 오는 프로그램 나가서 즐겁게 재미있게 하다가 오면 되는데, 나이가 들면 어울리는 곳을 골라서 나가야 해요. '미스트롯'을 처음 봤을 때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 거절했죠. 젊은 친구들이 노래를 잘 하는데 굳이 가지 않아도 될 것 같았고요. 그런데 제작하는 사람이 오래 전부터 인연이 있는 동생이라, 그 친구 부탁을 받고 나가게 됐죠. 조건을 걸었어요. 어울리는 분위기를 만들어 줄 것, 절대 심사평을 시키지 말 것. 딱 두가지였죠."
-심사평은 왜 제외했나요. "직업이 가수지, 심사하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심사는 전문가가 하는 거죠. 그런 평가할 수 있는 귀를 갖고 있고 실력이 있는 사람이 해야하는 일이에요. 가수 생활을 오래 했다고 심사를 잘한다는 건 아니죠. 전혀 다른 문제거든요. '미스트롯' 나온 사람들이 얼마나 의욕을 갖고 최선의 노력을 다해 무대를 준비했을 텐데 내 말 한마디로 좌우되는 것은 원치 않아요. 그렇게 두고 볼 수도 없고요. 참가자들이 노래를 예리하게 잘해서 감탄만 하다가 왔어요. 신인 때 쇼 프로그램 나간 생각도 들었죠."
-어떤 프로그램인지 궁금해요. "1960년대 '쇼쇼쇼'라는 방송인데 '미스트롯'이랑 비슷했어요. 노래만 있는게 아니라 웃음과 감동도 들어있어야 진정한 쇼예요. 우리 때에도 쇼를 통해 스타가 탄생하곤 했죠. 늦었지만 그때 제작진에 참 감사해요. '당신들이 나를 그렇게 키워줬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신인이 혼자 크는 법은 없거든요. 모두가 융합해서 하나의 예술을 계속 만들어가는 과정이 필요하죠. 요즘 음악방송에서는 노래만 부르고 들어가잖아요, 그런 건 쇼가 아니라고 봐요. '미스트롯' 녹화 끝나고 침체된 가요계에 좋은 프로그램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말해줬어요."
-직접 후배 발굴에 뛰어들 생각은 없나요. "하게 되면 대충은 못하죠. 지금 하는 일을 모두 접고 뛰어 들어야 하는데 그러질 못하니 할 수 없어요. 지나가다 잘하는 친구 있으면 옆에서 응원해주는 게 좋아요. 후배들 응원하는 것으로 만족할래요."
-트로트 가수 성공의 조건이 있다면요. "노래마다 색깔이 있어요. 그 포인트를 잡아야 해요. 트로트라고 하지만 그 안에 댄스, 발라드, 랩, EDM 다양하죠. 트로트는 4분의 4박자의 리듬이고 여기에 더해진 장르에 따라 창법을 다르게 표현할 줄 알아야 해요. 또 노래를 들으면 가수의 인생이 묻어나야 해요. 관객들에게도 그런 울림을 전달해 줄 수 있어야 하죠. 늘 노래할 때마다 인생이 3분 안에 들어있다고 생각하고 불러요. 마음을 건들이지 않으면 그건 노래가 아니에요."
-송가인의 노래는 어떤가요. "제일 좋아하는 소리가 우리 전통가요인 판소리, 국악이에요. 아주 신비한 소리죠. 울림이 있고요. 송가인에게도 약간 그 느낌이 있어요. 송가인만의 트로트 감성이 있다는 말이죠. 다른 가수에게선 느낄 수 없는 감성을 전달해주기 때문에 국민들이 송가인 노래에 감동하고 빠져들고 하는 거죠. 가수는 색깔을 갖는 게 가장 중요해요."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라는 수식어는 록 발성 때문이었죠. "사실 정통트로트를 못해서 팝을 섞어 나온 거예요. 중3때 '오! 캐롤'로 처음 음악을 접하고 쭉 팝만 들었어요. 학교 다녀오면 책가방 놓고 전축 앞으로 달려가 하루 종일 LP를 듣고 따라불렀죠. 아는 한국 노래라곤 국민학교 5학년 때 아버님 회갑잔치에서 부른 '방랑시인 김삿갓'이 유일했어요. 그 시절엔 노래 하나 나오면 온국민이 몇 년을 듣고 부르고 했거든요. 가요라곤 그 노래 하나를 불러본 사람이 트로트를 하려니 얼마나 어렵겠어요. 그래서 내식대로 롤모델을 찾았죠."
-당시 롤모델이 누군가요. "데뷔하기 1년 전인 1964년에 '맨발의 청춘'이 나왔어요. 故최희준 선생님이 부른 노래인데 이 양반이 완전히 팝에 영향을 받아 노래를 하더라고요. 선생님 노래를 따라하며 연습했죠. 1965년도에 1집 '서울 플레이보이'를 들고 방송국에 갔더니 내 목소리를 최희준 선생님으로 오해하는 PD도 있었어요. 선생님은 쭉 팝 스타일로 밀고 갔고, 나는 여기에 트로트 리듬을 섞어 소위 말하는 '뽕짝'으로 대박이 났죠. 노래를 잘해서가 아니라 이전에 없던 스타일로 노래했기 때문에 인기를 얻은 거예요. 트로트는 꺾기와 깎기를 잘해야 하는데 나는 잘 못해서 故현인 선생님 보면서 배워갔어요."
-지난해 최희준 별세에 어떤 마음이 들었나요. "내 바로 앞 세대가 하나 둘 가시니 '형님, 이제 제 차례도 오겠네요'하고 인사했어요. 내 로망이었고 큰 응원군이었는데 마음이 아팠죠. 본받을 점이 많은 양반을 만날 수 있어 운이 좋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