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수출 규제로 한일 관계가 악화 일로를 걷는다. 일본 제품에 대한 불매운동 확산에 신제품 행사를 잇따라 취소한 일본계 기업들은 당장 하반기 판매에 불똥이 튀진 않을지 우려한다. 반면 이들 기업과 경쟁 중인 국내 토종 기업들은 '반사이익'을 기대하는 눈치다. 일본이 '전략 물자 수출 우대 국가(화이트 국가)'에서 한국을 제외하는 것을 검토하는 등 규제 강화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이 같은 분위기는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
'반일'에 우는 일본계 기업…행사 취소 잇따라
14일 수입차 업계에 따르면, 한국닛산은 오는 16일로 예정돼 있던 신형 '알티마'를 돌연 취소했다.
신형 알티마는 6년 만에 완전 변경 모델로 돌아온 한국닛산의 대표 모델이다. 한국닛산은 지난달 초 사전 예약을 시작했다.
한국닛산은 행사 취소의 구체적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 '내부 사정'이라고만 했다.
하지만 최근 일본 제품 불매운동이 확산되면서 대대적인 대외 마케팅을 자제하도록 전략을 수정한 것으로 추정된다.
제품발표회를 취소한 것은 한국닛산뿐이 아니다.
'뫼비우스' 등의 담배를 만드는 JTI코리아는 지난 11일 기자간담회를 열고 신제품을 소개할 예정이었으나 내부 사정을 이유로 연기했다. 같은 날 소니코리아 역시 행사를 3일 앞두고 신제품 출시 행사를 돌연 취소했다. 일본의 수출 규제로 한일 감정이 격화되면서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일본 제품 불매운동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계 기업들은 이 같은 분위기가 하반기 실적에 악영향을 주진 않을지 노심초사한다.
특히 일본차 업계가 좌불안석이다. 한국수입차협회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수입차 판매량은 전년 동기 대비 22% 감소했다. 수입차 점유율 1위를 차지하는 벤츠마저 신차 판매량이 20% 줄었다. 이에 반해 도요타·렉서스·혼다·닛산·인피니티 등 일본차 브랜드 판매량은 10.3% 증가하는 모습을 보였다.
A일본차 업체 관계자는 "이달 들어 제품 시승이나 구매 문의가 줄긴 했다. 하지만 여름철 비수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일본의 경제 보복 조치에 따른 영향이라고 속단하기는 어렵다. 양국 간 정치적 갈등이 최대한 빨리 끝나기만을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의 기대와 달리 사태는 더욱 장기화될 전망이다. 일본 정부가 경제 보복을 확대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수출 규제 강화 조치의 '2탄'으로 군사 전용 가능성이 있는 품목에 대해 허가 신청을 면제해 주는 ‘화이트 국가’에서 한국을 제외하는 방안을 진행 중이다. 업계 의견을 듣는 공청회를 거쳐 오는 8월 중에 시행령을 개정해 발효한다는 계획이다. 이럴 경우 규제 대상이 공작 기계나 탄소섬유 일부 등으로 단숨에 확대될 전망이다. 일본 정부는 또 관세 인상, 송금 규제 등도 추가 보복 조치로 거론하고 있다.
일본계 기업의 한 관계자는 "일본 정부가 규제를 강화하면 한일 관계는 더욱 악화될 것이 뻔하다. 이로 인해 한국에 진출한 일본계 기업들의 하반기 실적은 예측 불가능한 상태에 빠지게 됐다"고 말했다.
'애국'에 웃는 토종 기업…반사이익 기대
악화된 반일 감정에 전전긍긍하는 일본계 기업들과 달리, 이들과 경쟁 중인 국내 토종 기업들은 남몰래 웃고 있다. 불매운동 등 여파로 반사이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국내 볼펜 생산 기업인 '모나미'와 의류 기업 '신성통상'이 그 대표적 기업으로 꼽힌다.
모나미의 경우 국내 필기용품 시장에서 1000원 이하 저가 제품을 장악했지만, 1000원 이상의 고가 제품 시장에서는 일본 제품에 밀린 상태다. 모나미 측은 "이번 불매운동이 문구 업계 전반으로 퍼지면서 시장점유율을 높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라며 "소비자들이 일본 제품 대신 국산 제품으로 눈을 돌리는 등 '메이드 인 코리아' 제품에 대한 인식이 바뀌길 바란다"고 말했다.
신성통산은 탑텐(TOP10) 브랜드를 보유한 덕에 일본계 의류 업체 유니클로의 대체 기업으로 부각되고 있다. 여기에 PN풍년·부방·쿠첸 등 국내 밥솥 기업들도 주목받는다.
시장에서는 앞으로 일본 제품 불매운동이 확산될 경우 전자·화장품 등도 반사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나온다.
이와 관련, 일부 국내 기업들은 '애국 마케팅'을 펼치는 등 반사이익 극대화에 나서고 있다.
탑텐은 광복절을 앞두고 '8·15 캠페인 티셔츠'를 내놨다. 총 5종의 티셔츠를 1945·윤동주·김구·유관순 등 대한민국 독립과 관련된 숫자와 인물을 내세워 디자인했다.
이랜드월드 스파오는 토종 캐릭터 '로보트 태권브이'와 협업한 제품을 선보였다. 스파오 관계자는 "광복 100주년을 맞아 고객 조사를 통해 준비한 협업 상품"이라며 "스파오와 로보트 태권브이는 일본 및 글로벌 브랜드들이 장악한 국내 시장에서 토종 콘텐트로 자존심을 지켜 온 브랜드로, 이번 협업은 상징적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유통 업계 한 관계자는 "일본 제품 불매운동 분위기가 점차 확산하는 것으로 보인다. 불매운동으로 희비가 엇갈린 기업들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지속될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