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화폐(암호화폐)거래소들이 은행과 실명 계좌 계약이 잇따라 종료되면서 재계약을 진행하고 있다. 실명 계좌를 받아 왔던 대형 거래소들은 무리 없이 시중은행과 계약을 이어 가고 있지만, 중소형 거래소들은 실명 계좌 계약이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는 전망이다.
30일 금융 업계에 따르면, 빗썸·업비트·코인원·코빗 등 주요 가상화폐거래소가 이달 말로 실명 계좌 계약이 종료되면서 재계약에 대한 협상 테이블이 열리고 있다.
실명 계좌는 가상화폐거래소가 거래하는 은행과 동일한 은행의 계좌를 보유한 이용자에게만 해당 계좌를 통해 입출금하게 하는 제도로, 정부가 지난해 1월 가상화폐 거래 실명제를 시행하면서 도입했다.
가상화폐거래소 입장에서는 은행으로부터 실명 계좌를 받지 못하면 원화로 가상화폐를 거래할 수 없어 실명 계좌 보유 여부에 사활이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가장 순조롭게 재계약이 진행된 곳은 국내 대형 거래소로 꼽히는 빗썸이다. 빗썸은 NH농협은행과 실명 계좌 계약 6개월 연장에 성공했다.
빗썸은 농협은행의 현장 실사 결과 8개 항목에서 모두 ‘적정’ 의견을 받고 사실상 실명 계좌 계약을 연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농협은행은 이달 빗썸에 대해 정부의 가상화폐 관련 정책 준수 여부 등을 점검했고, 여기에서 빗썸은 업계 최초로 지난달 자금세탁방지센터를 신설하고 보이스피싱을 방지하기 위해 농협은행과 공조하는 등 노력을 인정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코인원 역시 농협은행과 실명 계좌 계약 연장에 다다른 분위기다.
IBK기업은행과 계약을 맺어 온 업비트도 연장하는 것으로 협상을 마무리 지었다. 하지만 기업은행은 거래실명제 도입 전 기존 회원들에게만 실명 거래 계좌를 내주고, 신규 회원에 대한 계좌는 열어 주지 않은 그동안의 방식은 계속 고수하기로 했다.
신한은행과 실명 계좌 계약을 맺은 코빗은, 최근 신한은행이 금융 사기 신고가 접수됐다는 이유로 코빗의 모계좌에 지급 정지 조치를 내림에 따라 현재 실명 계좌로 거래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코빗과 신한은행이 재계약에 대해 긍정적으로 협상을 진행함에 따라 실명 거래 계좌가 연장된 뒤 지급 정지도 풀릴 것으로 보인다.
'자금 세탁 방지 의무'가 부과되는 등 최근 가상화폐거래소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는 상황에서 실명 거래 계좌의 연장이 무리 없이 진행된 대형 거래소들은 안도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중소형 거래소들은 더욱 공포에 떨고 있다.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FATF)는 지난달 가상화폐거래소에도 금융회사에 준하는 자금 세탁 방지 의무를 부과하고, 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으면 영업 허가를 취소하는 내용의 가상 자산 관련 국제 기준 및 공개 성명서를 채택했다.
이 중 ‘실명 확인 입출금 계정 서비스’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조항이 중소형 거래소들의 발목을 잡았다. 이 조건은, 가상화폐투자자는 본인 실명이 확인된 거래 계좌를 통해서만 가상화폐를 사고팔 수 있다는 의미다. 이미 우리나라에서도 해당 규정을 지난해 2월부터 실시하고 있지만, 대형 거래소 4곳을 제외한 중소형 거래소들은 여전히 실명 계좌가 아닌 벌집 계좌를 이용해 거래하는 실정이다.
게다가 가상화폐거래소가 ‘금융회사와 같은 수준의 자금 세탁 방지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는 조건도 포함되면서 중소형 거래소들의 부담이 더욱 커졌다.
FATF의 이런 권고 기준 등을 담은 특정금융정보법 개정안은 국회에 계류 중이며, 개정안이 통과되면 가상화폐거래소는 이런 조건을 충족시켜야 당국에 신고할 수 있다.
금융권 관계자는 “가상화폐거래소가 자금 세탁 방지 의무를 이행하고 실명 계좌를 받기 위해서는 송금인·수취인에 대한 정보를 수집·보유해야 하는 등 시스템적 기반이 있어야 한다. 이를 구축할 여력이 없는 중소형 거래소들은 어려움에 처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