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드라마 '봄밤'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 '시동' 등 바쁜 스케줄로 술을 멀리했던 정해인(31)이 취중토크를 핑계로 술잔을 기울였다. 밤톨처럼 잘 깎아놓은 외모에 차분한 목소리, 술과는 안 친해 보이지만 그는 맥주를 좋아하는 술이 고픈 남자였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봄밤' '유열의 음악앨범'까지 의도치 않게 감성 멜로 세 편을 자신의 필모그래피에 적게 됐다. 개봉 첫날부터 7년만에 한국 멜로 영화 오프닝 신기록을 세운 '유열의 음악앨범'은 정해인의 다양한 얼굴을 볼 수 있다. 반항적인 입꼬리·달콤한 눈빛 등. "예전 생각이 많이 났어요. 촬영하면서 그 시절이 떠올랐고 저에게도 첫사랑이 있었고 실패한 적도 있고요. 보는 사람들도 그때를 떠올리며 공감할 영화라고 봐요."
정해인의 데뷔는 2014년 드라마 '백년의 신부'로 시작된다. 이제 겨우 6년차. 다른 배우들에겐 6년차면 신인으로 불리지만 정해인은 늦게 데뷔한 만큼 남들보다 부지런히 움직였고 '신인' '대세'보다는 '배우'라는 타이틀이 더 어울리는 자리를 잡았다. 최근 3년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그러다보니 성장통을 겪을 때도 있었다. 지금은 배우로서의 평가도 중요하지만 '건강전도사'가 됐다. "입바른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는데 건강이 제일 중요하다는 걸 근래 많이 깨달었어요. 아버지도 아프셨고 저도 몸이 좋지 않았거든요. 돈이나 사랑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정말 건강이 최고에요. 특히 가족들의 건강이요." 인터뷰 도중 영상 하나를 내밀었다. '당신에게 남은 시간'이라는 한 보험사의 캠페인 영상이었다. 가족과 시간의 중요성을 얘기하는 영상을 보여주며 건강과 가족에 대해 한 번 더 강조했다.
모든 인터뷰 일정을 마무리하며 자리한 정해인은 벨트 풀고 잔치상을 받은 사람처럼 맥주병을 술술 비웠다. 3시간 넘게 피운 이야기 꽃은 각자 맥주 다섯병을 마시며 기분 좋을만큼 알딸딸하게 취한 뒤 끝났다. 술도 잘 마시고 솔직함이 매력인 따뜻한 남자였다.
-건강에 대한 중요성을 엄청 체감했네요. "맞아요. 맛있는 음식도 필요없고 정말 친한 친구들, 심지어 가족들도 잘 생각하지 못하게 되더라고요. 일도 사람도 다 우선순위에서 밀려요. 당장 내가 아픈데 어떡해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건강한건 당연하다 생각하고 그 다음 것을 계획하기 마련이잖아요. 건강한게 당연한건 아닌 것 같아요. 건강 이야기 계속 하는게 형식적이고 입바른 소리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도 알아요. 근데 진심이에요. 그렇게 보이더라도 말씀 드리고 싶어요."
-건강검진은 받았나요. "네. 간 수치가 많이 높다고 들었어요. 술 때문은 아니고 계속 일을 하다 보니까 피로와 독소가 빠지지 않고 쌓이는 것 같아요. 지금은 많이 좋아진 단계예요. 그래도 다음 작품까지는 시간이 좀 있어서 다행이에요. 5개국 정도 해외 팬미팅 투어가 잡혀 있긴 한데 최대한 잘 조율해서 잘 쉬어 보려고요. 휴식도 일의 연장선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일을 위해서라도 잘 쉬어야 할 것 같아요."
-휴식기 계획은 있나요. "가족여행 가고 싶어요. 어머니·아버지·남동생까지 넷이서 가보고 싶었는데 버킷리스트가 돼 버렸어요. 너무 가고 싶은데 올해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부모님도 다 일을 하고 계셔서 시간 맞추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제가 요즘 보고 있는 영상(삼성생명-당신에게 남은 시간)이 하나 있는데 보여드릴까요? 너무 좋아서 저장해 놓고 매일 보고 있어요."
-해인 씨는 가족사진을 마지막으로 찍은게 언제 인가요. "2013년인가…. 좀 오래됐죠.(웃음) 영상보고 깨달은게 많아요. 놓치고 있었던 것, 진짜 중요한 것들을 새삼 다시 생각하게 됐어요. 웬만하면 가족들과 최대한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해요. 영화도 얼른 보여드리고 싶어요. 그 순간이 정말 행복할 것 같아요."
-부모님이 엄청 뿌듯해 하겠어요. "연기하는걸 그렇게 반대하셨던 분들이….(웃음) 특히 아버지가 엄청 반대 하셨거든요. 전 말로 설득하지 않았고 행동으로 보여드렸죠. 그래도 인정받은 시기는 생각보다 빨랐어요. 대학교 야외무대에서 뮤지컬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아버지가 오셨거든요. '너 멋있다' 하면서 꽃다발을 툭 안겨 주셨죠."
-어릴 때부터 꿈이 배우였나요. "아니요. 대학 생활을 진짜 열심히 했어요. 매일 아침에 연습실에 들어가면 해 떨어지고 한 밤중이 되어서야 나왔죠. 운 좋게 대학교에 들어가서 어릴 때부터 배우 꿈을 갖고 있던 친구들을 만나니까 자존감이 박살나더라고요.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친구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한없이 부족하다는걸 느꼈고 '노력하지 않으면 도태 되겠구나' 싶었어요. 고등학교 때까진 친구들과도 '좋은 게 좋은 거지~ 친구잖아' 하면서 지냈는데 대학은 무시무시한 경쟁 사회더라고요. 연극 한번 하려고 하면 오디션을 봐야 했고, 암만 대학교지만 내가 못하면 작품이 있어도 캐스팅이 안 됐으니까요."
-스스로 중심을 잡는 계기가 됐겠네요. "'모든건 운이었구나. 잘난거 하나 없는데 운 좋게 연기에 발을 들였구나. 그러니까 노력을 몇 배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계속 다그쳤어요. 사실이기도 했고요. 그 때부터 학교에서 하는 모든 워크숍과 연극에 참여했어요. '데뷔를 늦게해서 아쉽지 않으세요?'라는 질문에 '아니요'라고 당당하게 답할 수 있는 것도 진짜 후회없는 대학 생활을 보냈거든요. 추억이 많아요. 그 때만, 우리끼리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애틋함이 커요."
-그게 본인의 초심일까요. "인터뷰를 할 때마다 느끼지만 저는 바뀌지 않아요. 바뀐다면 욕해주셔도 돼요. 무언가 바뀌어 보인다면 주변 환경이 바뀌는 거예요. 근데 저는 그 환경에 휩쓸리고 싶지 않아요. 휩쓸리지 않으려면 중심을 잘 잡아야 하는데 그럼 기본적으로 스스로를 잘 알아야 하죠. 단순히 겸손하자는 것이 아니에요. 겸손한 척과 진짜 겸손한건 또 다르고요. 내가 뭘 잘하는지, 내 위치가 지금 어디인지를 명확히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전 '건강하게 연기 오래하는 것'이 꿈이에요. 누군가는 이렇게 이야기 하면 '픽' 웃기도 하는데, 저로서는 '왜 웃지?' 당황스럽기도 해요. 건강한 것도 어렵고 연기를 오래하는 것도 어려운데 두 가지를 합쳐야 한다면 얼마나 힘들겠어요.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환경에 휩쓸리면 안 된다는걸 터득했어요."
-그것 역시 꿈만큼 어려운 일이네요. "향상 본질로 돌아가야 하는 것 같아요. '내가 왜 이 환경에 놓였고 내가 왜 이 사랑을 받지? 나를 왜 좋아해주지? 난 뭐하는 사람이지?' 꼬리에 꼬리를 물면 답이 나와요. 제 직업은 배우예요. 그럼 연기를 잘해야죠. 어쩌면 그게 해야할 전부일 수도 있어요. 연기에 대해 계속 고민하고 거기에 포인트를 둬야 하는 것 같아요. 연기가 수단이 되면 안되고요. 시간 혹은 돈을 투자해서 연기를 봐 줄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요. 늘 부족하지만, 항상 후회는 남지만 '최선을 다 한다'고는 말할 수 있어요."
-환경과 상황이 변하면 의도치 않은 상처를 받을 때도 생기죠. 호평과 혹평 모두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고요. "저에 대한 이야기 혹은 소문은 그게 진실이건 아니건 다 알고 있어요.(웃음) 기사·댓글도 빠짐없이 봐요. 물론 사람인지라 아플 때도 있고요. 이렇게 웃으면서 말할 수 밖에 없지만 진짜 우울증이 오기 쉬운 직업인 것 같아요. 자신을 더 사랑해야 하는 이유이고요. 좋아해서 하는 연기를 좋게 봐준다는 것 만큼 행복한 일이 어디 있어요. 복에 겨운거죠. 근데 사람이 너무 행복할 땐 두려움이 엄습할 때가 있어요. 너무 행복하면 '아, 좀 이상한데' 싶어요. 언젠가는 끝날걸 아니까. 그래서 더 노력하는 것 같아요."
-주연작으로 흥행에 대한 부담과 책임감을 느끼진 않나요. "흥행은 아무도 모르잖아요. 결과는 하늘의 뜻이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부담은 크게 없어요. 근데 책임감은 더 커졌어요. 홍보도 책임감 때문에 하는 것이고요. '난 최선을 다해 찍었고 결과가 어떻든 끝까지 책임을 져야겠다'는 마음이죠. 정신력이 체력을 이기는 것 같아요.(웃음)"
-주변인들의 칭찬이 자자해요. 너무 칭찬밖에 들리지 않아서 '진짜인가?' 싶을 때가 있을 정도로요. 그만큼 주변 사람들을 잘 챙긴다는 뜻이겠죠. "하하. 그런가요. 사람을 길게 봐요. 쉽게 친해지지도 않고요. 대신 한번 친해지면 끝까지 가는 스타일이에요. 뭐든, 언제든 솔직한게 최고인 것 같아요. 진솔하면 상호작용은 자연스레 뒤따르겠죠. 개인적으론 기자와 배우의 관계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어느 순간 그렇지 않은, 그렇지 못한 상황이 돼 버린 것 같아 안타깝고 슬프기도 해요."
-출연한 작품의 배우·스태프들과도 오랜 인연을 이어가고 있죠. "감사하게도 '당잠사' '슬빵' '밥누나' '봄밤' 팀 모두 시사회에 와 주기로 했어요. 엄청 힘이되고 든든할 것 같아요. 포토월이 없어서 더 편하게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메시지로 응원도 많이 받았어요."
-대세 배우가 됐어요. "어떤 일이든 10년을 넘어가면 장인이라 불려도 되는 것 같아요. 근데 저는 아직 멀었어요. 멀었는데 '대세'라고 해 주시니까 불편한 감도 있어요. 이제 6년 밖에 안 됐는데 어쩔 줄 모르겠는거죠. 음…. 저는 그냥 반짝?(웃음) 어떤 면에서는 대세라는 말이 슬프기도 해요. 지금 대세라는건 언젠가는 '한 때 대세였다'고 바뀔 수도 있는 거잖아요."
-'대세'가 지나면 '믿고보는'이 기다릴 수도 있겠죠. "아휴~. 개인적으로는 수식어를 안 좋아해요. 왠지 배우의 스펙트럼을 좁히는 것 같아요. '작품을 선택한 이유가 뭐예요?'라고 물어 보시면 순간 당황해요. '선택이요? 제가요?' 하게 되는거죠. 연기한지 20년 넘은 선배님들처럼 '저는 이러 이러했고, 이러한 이유로 선택했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은데 '좋아서 했어요. 불러 주셔서 했어요. 찾아 주셔서 했어요'가 저에게는 팩트거든요. 여러 고민이 있는데 열심히 하면 또 답이 찾아지지 않을까 생각해요."
-연애는요. 외롭지 않나요. "연애는 쉬면 안 되나봐요.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자유롭지 못하니까 (연애에) 휴식이 생기는데, 할 수 있다면 계속 해야죠.(웃음)"
-차기작은 촬영을 마친 '시동'과 드라마 '반의반'으로 결정했어요. "'시동'은 지금까지 보여드렸던 장르와는 많이 달라서 기대하고 있어요. 제3 금융권에 일하면서 돈 떼먹은 사람 잡으러 다니는 작품이에요. (윤)경호 선배와 엄청 뛰어 다녔죠. 못 봤던 정해인의 연기를 볼 수 있지 않을까.(웃음) '반의반'은 잘 쉬면서 또 열심히 준비 하려고요. 곧 돌아올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