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 베어스가 2019 KBO리그 통합 우승한 다음 날인 27일, 김태룡(60) 두산 단장은 수백 통의 축하 전화와 메시지를 받았다. ‘20세기 최강’ 해태 출신 인사의 축하가 특히 많았다. 1983~2000년 해태 감독 김응용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장은 “두산이 운영을 참 잘한다. 선수들이 많이 빠져나가도 또 우승했다”고 감탄했다. 1990~98년 해태 단장 이상국 전 KBO 사무총장은 “넌 내 후계자”라며 껄껄 웃었다.
2000년 이후 두산은 한국시리즈(KS)에서 5번 우승했다. 21세기 들어 우승은 삼성(7번) 다음으로 많다. KS 진출은 두산과 삼성이 11번으로 같다. 2016년 이후 삼성은 투자를 축소하면서 하위권으로 떨어졌다. 큰돈을 쓰지 않는 두산의 성과는 그래서 더욱 놀랍다.
핵심은 결국 사람이다. 자유계약선수(FA)가 떠난 두산의 빈자리에서는 어김없이 새로운 스타가 떠오른다. 전 세계로 영토를 넓혀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 됐던 영국이나 스페인처럼, 두산은 ‘별이 지지 않는 구단’이다. 수많은 선수와 코치·감독이 오갔어도 두산의 기조는 바뀐 적이 없다.
두산 야구의 시작은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직후다. 1999년 모기업이 OB맥주를 매각하면서 두산은 2군 훈련장과 숙소를 잃었다. 이전까지 OB맥주 공장 숙소를 빌려 썼기 때문이다. 당시 대부분의 구단은 존폐를 고민했다. 2군 육성까지 눈 돌릴 여력이 없었다. 가장 어려울 때 두산은 미래를 준비했다. 당시 운영부장이었던 김 단장은 “우리는 다른 구단처럼 많은 돈을 쓸 수 없었다. 유망주 육성이 유일한 답이라고 생각했다”며 “컨테이너를 빌려 급한 대로 시설을 만들었다. 그리고 10명의 선수를 선별해 담당 코치를 두고 집중 훈련했다”고 회상했다.
이천 훈련장이 정비됐다는 말에 당시 두산의 젊은 선수들은 이를 악물고 뛰었다. 10명 안에 들기 위해서였다. 몸을 던지는 허슬 플레이, 경쟁과 협동이 공존하는 두산 선수단 문화는 이때부터 내려온 유산이다. 김 단장은 “1995년 우승 직후 전력이 확 약화했다. (KS MVP였던) 김민호가 부상을 입자 대체할 유격수가 없었다. 이때부터 포지션 공백을 대비했다. 김민호 은퇴 후 신고 선수(연습생) 손시헌이 유격수를 차지한 것이 그 시작”이라고 말했다.
수년 전만 해도 야구단 사장·단장의 임기가 짧았다. 주로 그룹에서 내려온 인사여서 전문성도 부족했다. 미래를 대비할 겨를이 없던 1990년대 말부터, 두산은 ‘인위적인 세대교체’가 아닌 ‘자연스러운 세대 순환’ 구조를 만들었다. 선수단뿐 아니라 구단도 마찬가지였다. 사원·대리 출신들이 부장을 거쳐 임원으로 성장했다.
김 단장은 “과거 감독들은 선수들에게 ‘입대를 최대한 늦추라’고 했다. 그러나 구단은 더 멀리 봐야 한다. 포지션별로 주전과 백업, 그리고 제3의 선수까지 갖춰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유망주의 기량과 인성까지 정확하게 파악해 육성하는 두산의 시스템은 20년 이상 시행착오를 거쳐 만들어졌다. 아울러 선수의 입대와 FA 자격 획득 시점까지 계산하며 준비한다.
2014년 중견수 이종욱(4년 50억원)과 유격수 손시헌(4년 30억원·이상 NC), 2016년 좌익수 김현수(2년 80억원·볼티모어), 2018년 우익수 민병헌(4년 80억원), 올해 포수 양의지(4년 125억원·NC)가 차례로 두산을 떠났다. 대형 선수 하나만 이탈해도 팀이 휘청이는데, 두산은 지난 5년 내내 KS에 진출했고 세 차례나 우승했다. 우승한 올해도 팀 평균 연봉은 전체 5위(1억5431만원)다.
이강철 KT 감독과 한용덕 한화 감독은 두산 수석코치 출신이다. 성공해서 팀을 떠나면 모두 축하해준다. 여러 사람이 떠나도 두산은 두산이다. 김 단장은 “두산은 사람을 함부로 내치지 않는다. (롯데에서 이직한) 나도 29년째 두산에서 일하고, 부장들도 25~28년씩 근무하고 있다. 다들 말없이 일하지만, 각자 무엇을 어떻게 할지 너무도 잘 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