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연극 '한여름밤의 꿈'으로 데뷔해 28년 동안 한 길만 보고 달려왔다. 무명시절이 길고도 길었지만 연기가 좋았고 사람들에게 따뜻한 위로가 되어주는 말을 전해주고 싶어 뚝심 있게 걸어왔다. 지금에 와서는 "그게 관종의 힘인가"라고 웃어 보였지만 긍정적인 이정은의 에너지가 위기를 이겨낸 원동력이었음이 인터뷰 내내 느껴졌다. 지난 6월 취중토크로 만났던 이정은과 반년 만에 재회했다. 그 사이 흥행 엔진은 쉼이 없었다. KBS 2TV 수목극 '동백꽃 필 무렵'(이하 '동백꽃')을 통해 공효진과 모녀 호흡을 맞췄다. 진한 모성애를 전한 정숙 역으로 눈시울을 붉혔다. 올해 KBS 미니시리즈 중 가장 좋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최종회에서 23.8%(닐슨 코리아 전국 기준)를 찍었다.
올해 JTBC 드라마 '눈이 부시게'로 제55회 백상예술대상 TV부문 여자조연상을 수상했던 이정은. 영화 '기생충'으로 칸 영화제에 진출하는 영광을 품에 안았고 황금종려상으로 팀 전체가 기쁨을 만끽했다. 제24회 춘사영화제 여우조연상, 제40회 청룡영화상 여우조연상까지 섭렵하며 '상복(福)'을 입증했다. "어머니가 올해 삼재라고 했는데 호삼재가 들면 나쁘지 않다고 하더니 호삼재가 들었다 보다"라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변함없는 인간미 넘치는 미소로 반겨줬다. 호감을 주고받을 줄 아는 배우, 이정은은 볼수록 매력 넘치고 빠져들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동백꽃' 하면서 기억에 남는 반응은. "동백이가 용식이하고 헤어질 때 엄마로서 역할에 돌아가야겠다고 하는데 그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실제 한부모 가정 친구들이 엄마로서의 삶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그런 기회를 잘 잡지 못한다. 일상을 포기한다. 그 대목에 너무 슬펐다. 용식이 엄마 마음이 훨씬 더 보편적인 마음이다. 100% 공감했다."
-이 작품의 인기 비결은 뭐라고 생각했나. "임상춘 작가의 필력인 것 같다. 이상한 행동을 하는데 제시카도 나중에 보면 관종이 된 이유가 나온다. 보수적인 아버지 밑에서 엄마가 기도 못 피우고 자기만 낙오된 느낌이 드는데 관종이 안 되리란 법이 어디 있나. 정말 대본을 잘 쓴 것 같다. 정숙 역할은 누가 해도 잘했을 것이다. 역할이 좋다는 건 배우들 모두 알고 있었다. 역할에 대한 비중과 애정을 알고 있었기에 주변에서 '정말 큰 역할이야' '잘해야 한다'고 했다."
-옹벤져스와 이전부터 아는 사이였나. "야채가게 하는 (백)현주는 드라마 '송곳'에서 만났다. (김)선영 씨는 옹벤져스 대장답게 디렉트로 표현하는 스타일이다. 예전에 (라)미란 씨네 집에서 같이 저녁을 먹은 적이 있는데 난 소심해서 쭈뼛쭈뼛하곤 했는데 '만나고 싶었다'고 스스럼없이 인사하더라. 자기표현에 적극적인데 눈물이 많은 배우다. 염혜란 배우는 무대에서 처음 봤다. 너무 좋아하는 배우였는데 같은 작품으로 만나 반가웠다."
-까불이 아버지와 20대 때 만나고 재회한 거라고 하더라. "까불이 아버지 신문성 씨는 20대 때 만났다. 아버지 역할이라니 벌써 그런 나이가 됐구나 싶더라. 웃었다. 중간중간에 공연 소식을 듣기도 했고 가끔 대학로 술자리에서 보긴 했는데 아버지가 되어서 나타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아버지 역으로 손색이 없더라. 좋아해야 할 일인지 모르겠지만 역할로 보니 너무 멋있었다."
-엄마의 반응은. "내 딸이 예쁘게 나오면 좋은데 민낯으로 나오니 서운하다고는 하는데 좋았다고 했다. '기생충' 때는 '얘 너 너무 조금 나온다. 그런데 사람들이 각광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하더라. 엄마한테는 색다른 게 없었나 보다.(웃음) 어머니는 드라마 광팬이다. TV 속으로 들어갈 것 같다. 예전엔 엄마의 조언이나 평가가 기분 나쁘게 들렸는데 엄마를 만족시키기 위해 열심히 연기했다. 엄마의 냉정함이 나의 몇 할을 키운 것이다. 정말 열심히 기도한다. 냉정함 뒤엔 기도하는 마음이 존재하니 그게 날 키우고 있는 것 같다."
-오랜 무명시절을 보낸 뒤 성공했다. "남자 배우들도 40대 중반 정도에 조연으로 크는 경우가 있는데 여자 배우들 같은 경우 흔치는 않다. 난 50살에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지 않나. 사회적으로 연기를 통해 좋은 영향을 미치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했는데 내가 살아왔던 길이 지치고 힘든 사람들에게 뭔가 열심히 하면 내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것 같다. 그것만 해도 큰 만족이 되는 것 같다. 어안이 벙벙하다."
-연기에 대한 성장도 느끼나. "내 연기에 대해 정말 냉정하게 말하면 크게 변한 것 같지 않다. 근데 영화 '와니와 준하'를 보면 깜짝깜짝 놀란다. 책을 읽고 읽더라. 글을 잘 써주는 분들에 의해 좋은 역을 맡으면서 변한 것 같다. 뭔가 한 겹을 두고 보는 게 아닐까 두려움도 있는데 현 위치에 있는 게 비현실적으로 다가올 때도 있다. 작업했던 분들이 오랫동안 지켜보고 역할을 준 거라 생각한다."
-봉준호 감독과도 두터운 인연을 자랑하지 않나. "그런 정도의 친분은 없었다. 잠깐 오라고 해서 녹음하고 그런 것이다. 정말 10년에 한 번 볼까 말까다. 봉준호 감독 덕에 '기생충' 특수를 누리고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천천히, 좀 더 겸손하게 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게 거품일지 모른다. 어머니도 공감한다. 남한테 상처 주지 말고 열심히 하라고 했다."
-지금까지 했던 역할 중 가장 애정이 가는 캐릭터는. "하나를 꼽긴 어렵다. tvN 드라마 '오 나의 귀신님' 서빙고 역할은 지금도 많이 기억에 남는다. 포문을 열어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원할 줄 알았던 인기가 딱 3개월 지나니 사라지더라. 평정심을 그때 배웠다. 각광을 받게 한 문광이란 역할은 천운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마더'의 멱살 한번 잡은 인연으로 큰 역을 줬다. 몇 년 뒤에 이런 역할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다. 감사하다."
-잘 될 거라고 믿었나. "일일극을 할 때였는데 한 감독님이 유해진 배우와 비슷한 경로의 느낌이 든다고 했다. 얼마 전에도 봤는데 그런 얘기를 하더라. 역할이 주어지지 않으면 배우들은 스스로 뭘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시대가 원하는 여배우에 대한 생각이 변화하는 것 같다. 시대를 잘 만난 느낌이다." >>[인터뷰③] 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