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부터 12월까지, 한 바퀴를 돈 시간 속에서 한국 축구는 여러 가지 성과를 냈고 역사를 썼으며 기록을 만들었다. '정정용호'는 남자 축구 사상 처음으로 국제축구연맹(FIFA) 주관 대회인 20세 이하(U-20) 월드컵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고 U-17 대표팀도 역대 최고 타이 성적인 8강 진출에 성공했다. 여자축구는 월드컵 16강에 실패했지만 새로운 외국인 사령탑을 맞아 새 출발을 했고, '김학범호'는 2020 도쿄올림픽을 정조준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행보 중에서도 가장 많은 관심을 모으고 있는 '벤투호'의 여정이 18일 끝난 2019 동아시아축구연맹(EAFF) E-1 챔피언십(동아시안컵)으로 마무리됐다. 2022 카타르 월드컵을 향한 지난한 여정을 이어가고 있는 파울루 벤투(50) 감독과 한국 남자 축구대표팀은 한 해의 마지막을 동아시안컵 3연패라는 값진 성과로 마치며, 잠시 쉬어가는 마침표를 찍고 휴식에 들어갔다.
벤투호에는 퍽 다사다난한 한 해였다. 지난해 8월, 벤투 감독이 부임한 후 남미의 강호 칠레와 0-0으로 비기고, 한국 축구 역사상 최초로 우루과이(2-1 승)를 꺾는 등 만족스러운 허니문 기간을 보내며 기대감을 모았던 벤투호는 새해와 함께 여러 가지 문제들에 직면했다. 새해 첫날 열린 사우디아라비아와 평가전에서 0-0으로 무승부를 기록하며 유효슈팅 0개로 실망감을 불러일으킨 것이 시작이었다. 벤투 감독 부임 후 첫 국제대회 우승을 노렸던 2019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에선 약체들을 상대로 경기를 어렵게 풀어가다 8강에서 카타르에 패해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아시안컵 패배로 가장 많은 고민을 했을 사람은 벤투 감독 자신이다. 당시 아시안컵에서 치른 5경기 모두 같은 포메이션에 선수 기용폭도 좁아 단순한 전술, 단순한 선수 기용이라는 비판에 직면했다. 아시안컵 탈락 이후 치른 다섯 차례 평가전에선 볼리비아(1-0 승)와 콜롬비아(2-1 승) 그리고 호주(1-0 승) 이란(1-1 무) 조지아(2-2 무)를 상대로 무패를 달리며 좋은 모습을 보였지만 10월 시작된 2022 카타르 월드컵 아시아지역 2차예선에선 아시안컵 때와 마찬가지로 약체를 상대로 압도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며 2승2무로 조 1위를 지키지 못하고 2위로 내려앉았다.
실전만 들어서면 답답해지는 벤투호의 경기력에 조금씩 의문부호가 붙기 시작했다. 브라질과 평가전에서 0-3 완패를 당하고도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며 잠시 분위기가 전환됐던 것과 달리, 해외파 없이 치르는 올해 마지막 대회인 E-1 챔피언십에서 상대적 약체들을 상대로 세트피스로만 득점을 올리는 모습을 보여주자 불신은 다시 거세게 불붙었다. '졸전', '퇴보'와 같은 단어들이 기자회견장에서 거론되고 일본 언론들은 '한일전' 결과에 벤투 감독의 입지가 위험해지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던졌다.
자신을 향한 불신이 조금씩 커져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벤투 감독은 흔들림 없는 태도를 고수했다. 벤투 감독은 팀의 경기력에 대해, 전술에 대해, 선수 기용에 대해 묻는 모든 질문에 한결같은 답을 내놨다. "우리 스타일의 축구를 하겠다"는 답이다. 그동안 실전에서 결과가 따라붙지 않아 설득력이 없었던 그 말은 이번 동아시안컵에서 묵직한 무게감을 얻었다. 18일 열린 일본과 최종전, '한일전'이라는 무게감이 실린 경기에서 벤투호는 자신들이 비판받았던 부분에 대한 깔끔한 답변을 내놨다.
그동안 무의미한 점유율 축구라는 비판을 받았던 벤투호지만 이날은 달랐다. 작심하고 빠르게 경기 템포를 끌어올렸고, 평소의 빌드업 추구와 다르게 측면을 활용한 롱패스도 많았다. 전방압박으로 일본의 패스길을 끊고 상대를 괴롭혔으며 경기를 지배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골대를 두 번이나 맞힌 탓에 득점은 1골에 그쳤지만 상대였던 일본의 모리야스 하지메(51) 감독도 완패를 인정할 만한 경기를 펼쳤다.
이 승리로 벤투호는 동아시안컵 3연패, 최초의 개최국 우승, 최초의 전승 우승, 벤투 감독 부임 후 첫 국제대회 우승 등 여러 가지 기록을 한 번에 써내려가며 2019년을 마무리하는 '덤'도 얻었다. 하지만 수많은 기록 속에서도 가장 의미 깊은 건, 벤투호의 2019년을 정의하는 벤투 감독의 말에서 찾을 수 있다. 벤투 감독은 한일전 승리 후 기자회견에서 당당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축구를 조금이라도 아시는 분들이라면, 우리가 우리의 자취를 남기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 것이다. 부임 이후 1년여 동안 확실하게 우리만의 색깔과 스타일을 확립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벤투호가 가야할 길은, 벤투 감독 스스로 말한 것처럼 아직 멀고 험난하다. 2022 카타르 월드컵까지 가는 여정은 그의 말대로 상당히 길다. 이 과정에서 개선해야 할 부분은 앞으로도 많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벤투 감독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함께하는 선수들이 확신과 믿음이 있고 또 자신이 있기 때문에, 우리 스타일을 꾸준히 유지하며 잘 이끌어나갈 예정"이라는 그 말 속엔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겠다는 뚝심이 묻어난다. 벤투호가 2019년 보여준 '자취'는 바로 여기에 있다. 동아시안컵 우승으로 자신들의 색깔과 스타일, 그리고 뚝심을 증명한 벤투호가 필요로 하는 것은 미완성에서 완성을 향해가는 과정을 기다려 줄 모두의 인내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