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2020 독일 분데스리가 29라운드 도르트문트와 파더보른의 경기가 열린 1일 벤텔러 아레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관중석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제이든 산초(20·도르트문트)는 골을 넣자마자 침착하게 카메라 쪽으로 뛰어가며 유니폼을 벗고, 셔츠에 쓰여진 글씨가 더 잘 보일 수 있도록 손으로 옷을 잡아당겼다. 도르트문트의 유니폼 색깔과 꼭 같은 노란 언더셔츠에는 'Justice for George Floyd(조지 플로이드를 위해 정의를)'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지난 25일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백인 경찰관의 강압적인 체포 과정에서 목이 짓눌려 사망한 조지 플로이드를 추모하고, 인종차별을 규탄하기 위한 세리머니였다. 옐로카드와 맞바꾼 항의의 세리머니 후, 산초는 보란 듯이 해트트릭을 터뜨리며 팀의 6-1 대승을 이끌었다.
미국의 마지막 노예선이 서아프리카 해변을 떠난 지 160년이 지났다. 더이상 노예가 존재하지 않고,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차별해선 안된다는 법률이 제정된 지도 반세기가 넘었다. UN총회에서 세계 인권 선언문을 채택하고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그 존엄과 권리에 있어 동등하다. 인종이나 피부색, 성, 언어, 종교, 정치적 또는 기타 견해와 민족적, 사회적 출신, 재산, 출생 또는 기타의 신분과 같은 어떠한 종류의 차별 없이 모든 권리와 자유를 향유할 자격이 있다"고 선언한 것이 1948년 12월 10일이다. 그러나 반세기가 넘는 긴 시간 동안에도 무수한 차별은 사라지지 않았고, 2020년 6월이 된 지금도 세계는 플로이드라는 이름의 한 흑인 남성의 죽음 앞에 분노하고 있다.
플로이드의 죽음은 단순히 한 개인의 사망 사건이 아니었다. 미국 전역, 더 나아가 전세계에 내재되어 있던 인종차별 갈등에 불을 붙인 트리거였고, 미국 흑인 사회는 경찰의 무자비한 공권력 집행과 끝나지 않는 인종차별에 분노하며 거리로 나섰다. 시위는 미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고, 막대한 영향력을 자랑하는 할리우드 스타들을 비롯해 유명인들까지 합류해 뿌리 깊은 인종차별을 규탄하는 중이다.
스포츠계 역시 예외가 아니다. 세리머니로 자신의 뜻을 밝힌 산초뿐만 아니라 수많은 스타들이 이번 사건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전설적인 '무패 복서' 플로이드 메이웨더 주니어(43)는 플로이드의 모든 장례 비용을 부담하기로 했고, 정치적 발언이나 사회적 비판을 자제해왔던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57)은 이례적으로 성명을 발표해 "매우 슬프고 진심으로 고통스러우며 분노를 느낀다"고 말했다. "나는 뿌리 깊은 인종 차별, 유색 인종에 대한 폭력에 저항하는 이들과 함께한다"고 말한 조던은 "우리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불의에 저항하는 우리의 뜻을 표현해야 한다"며 "하나 된 목소리는 우리의 지도자에게 법률을 개정하도록 압력을 가해야 하고, 그게 실현되지 않으면 투표로 제도적 변화를 끌어내야 한다"고 자신의 뜻을 밝혔다.
산초보다 하루 앞서 플로이드의 죽음을 추모하는 완장을 차고 나온 미국 축구선수 웨스턴 맥케니(22·샬케04) 여자 프로테니스를 대표하는 세리나 윌리엄스(39) F1 슈퍼스타 루이스 해밀턴(35) 가장 비싼 몸값을 자랑하는 축구계의 신성 킬리안 음바페(22·파리 생제르맹) 메이저리그 뉴욕 메츠의 투수 마커스 스트로먼(29) 등 흑인 선수들은 물론 로코 볼델리 미네소타 트윈스 감독, 게이브 케플러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감독, 아담 웨인라이트(39) 피트 알론소(26) 등 백인 감독과 선수들도 플로이드에 대한 애도와 인종차별에 대한 비판에 가세했다. 잉글랜드 프로축구(EPL) 리버풀은 아예 선수들이 홈 구장인 안필드의 센터서클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단체 사진을 올려 인종차별 반대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다. 2016년 미국프로풋볼(NFL)에서 콜린 캐퍼닉이 인종차별에 항의하기 위해 미국 국가연주 때 한쪽 무릎을 꿇은 것에서 유래한 인종차별 항의 퍼포먼스다.
스포츠 선수들이 이번 사건에 적극적으로 발언하는 이유는 그들이 몸담고 있는 스포츠계가 인종차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종목을 불문하고 스포츠계에선 끊임없이 인종차별 관련 문제가 불거진다. 프로스포츠 시장의 세계화에 따라 선수들의 국제적인 이동이 늘어나면서 이미 오래 전부터 인종차별 문제로 갈등을 겪었기 때문이다. 올림픽이나 월드컵처럼 전세계 국가들이 참여하는 글로벌 스포츠 이벤트는 대회 때마다 인종차별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극도의 노력을 기울인다.
글로벌 스포츠의 대표 주자인 축구는 그라운드에서 인종차별을 퇴출하기 위해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여 온 종목이다. 국제축구연맹(FIFA)은 인종차별 금지 캠페인을 적극적으로 실시하고 있으며, 여러 인종이 함께 뛰는 유럽리그를 비롯해 대부분의 리그에서도 인종차별 행위는 엄격하게 다스려진다. 하지만 축구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라운드 안팎에서는 여전히 인종차별이 이어지고 있다. 파트리스 에브라, 마리오 발로텔리, 폴 포그바, 라힘 스털링 등 축구장에서 인종차별을 당한 선수들은 무수히 많다. 아시아인인 손흥민(28) 역시 유럽 무대에서 뛰면서 지속적인 인종차별에 시달려 왔다.
스포츠 선수들이 플로이드 사건에 분노하고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메시지를 밝히는데 주저하지 않고 나서는 건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1968년, 흑인 인권 운동에 앞장섰던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암살당한 뒤 열린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남자 육상 200m 금메달과 동메달을 딴 미국의 토미 스미스, 존 카를로스는 맨발로 시상대에 올랐다. 미국 국가가 울려퍼질 때 고개를 숙인 채 검은 장갑을 낀 한 손을 들어올려 흑인 저항운동 '블랙파워'에 지지를 표시했던 두 사람은 이후 올림픽에서 추방됐고 귀국해서도 살해 위협에 시달렸다. 당장 2016년, 무릎꿇기로 인종차별에 항의했던 캐퍼닉 역시 이후로 팀을 찾지 못한 채 무적 신세가 됐다. 이처럼 어떤 불이익이 돌아올 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이들이 목소리를 내고 있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종차별은 사라져야만 하는 일이며 스포츠계 역시 인종차별 문제와 정면으로 부딪혀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