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28일. GS스포츠는 엄태진 신임 대표이사 선임을 발표했다. FC 서울이 새로운 역사를 쓰기 시작한 건 이때부터였다.
엄 대표는 GS그룹이 인정하는 재무전문가였다. 당시 서울은 빅클럽답지 못한 투자로 인해 하락세를 겪고 있었다. 재무전문가인 사장급 인사가 신임 대표로 부임하자 서울이 바뀔 거라는 기대가 많았다.
기대감이 꺼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재무적인 시각으로만 축구단을 바라본 것 같다. 경영 효율 극대화를 강조하느라 스쿼드의 질을 높이는 투자, 우승을 위한 지원은 소홀히 했다.
엄 대표 부임 첫 시즌인 2018시즌부터 서울은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시즌 초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황선홍 감독이 사임했다. 서울은 감독 경험이 없고, 서울 1군 코치 경험도 없는 이을용 2군코치를 감독대행으로 선임했다. 검증되지 않은 인물을, 구단 인사 철학의 연속성 없이 발탁했다는 지적이 쏟아졌다.
이 감독대행 체제는 오래가지 못했다. 성적은 나아지지 않았고, 4개월 만에 물러났다. 갑자기 지휘봉을 잡은 건 이 감독대행에게도 불운이었다. 결국 서울은 최용수 감독에게 지휘봉을 맡겼다. 2018년 한 시즌 동안 감독 두 명이 물러나고 세 번째 감독이 왔다. 엄 대표의 두 번째 새 역사다.
세 번째 새 역사는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하위 스플릿으로 떨어진 것이다. 이는 네 번째 굴욕의 역사로 이어졌다. 리그 11위로 추락한 서울은 구단 최초로 승강 플레이오프 무대를 밟았다. 2부리그 강등 직전까지 몰린 것이다.
서울은 가까스로 1부리그에 잔류했다. 엄 대표는 장문의 글을 남겼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지금 이 시간부터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뛰겠습니다. 미진했던 점에 대해 철저하게 반성하고, 개선의 방법을 반드시 마련하겠습니다. FC 서울다운 모습을 되찾을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이겠습니다."
서울은 바닥을 다지고 올라가는 듯했다. 2019시즌 전반기까지 선전했다. 하지만 후반기가 시작되자 추락을 거듭했다. 명백한 이유가 있었다. 서울은 K리그 구단 중 여름 이적 시장에서 선수를 단 한 명도 영입하지 않은 유일한 구단이었다. 서울 팬들은 "영입 대신 '0입'"이라고 했다. 엄 대표 체제의 다섯 번째 새 역사였다.
기성용 영입 불발은 여섯 번째 새 역사다. 지난 2월 서울에 오고 싶다는 서울 출신 레전드를 사실상 내친 것이다. 이 사태는 서울을 큰 혼돈으로 몰아넣었고, 구단은 거대한 후폭풍을 맞았다. 이청용 역시 서울을 외면하고 울산 현대로 이적했다.
일곱 번째 새 역사는 세계적인 조롱거리가 된 '리얼돌' 사태다. 해외 토픽이 될 만큼 유명한 사건이니 더 설명할 필요도 없다.
2020년 서울은 급격히 추락했다. 또 11위까지 떨어졌다. 선수 영입에 소극적인 자세도 변하지 않았다. 여름 이적 시장에서 기성용 영입에 성공하자 기세가 등등했다. 정작 서울 스쿼드에 가장 필요한 포지션인 외국인 공격수 영입은 외면했다. 반등의 기미가 보이지 않자 최용수 감독이 사임했다.
엄 대표가 만든 새 역사에는 공통점이 있다. 구단 운영의 모든 분야에서 '역대 최대 위기'가 찾아왔다는 점이다. 성적 부진은 매번 감독의 책임으로 전가했고, '리얼돌' 사태는 실무진 징계로 마무리했다.
구단 행정을 총괄하는 수장인 엄 대표는 앞으로 나와야 할 상황일 수록 철저하게 뒤로 숨었다. 특히 '리얼돌' 사태 때 엄 대표가 직접 사과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외면했다. 기성용 영입에 실패하고, 외국인 공격수 영입에 실패해도 팬들에게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았다. 일부 서울 팬들이 "엄태진 아웃"을 외치는 이유다.
서울은 1000만 인구의 수도 구단이라는 프리미엄을 누린다. 그러나 그에 걸맞은 책임은 지지 않으려 한다. 한 축구인은 "이럴 거면 서울을 떠나라. GS그룹이 아니더라도 수도 서울의 유일한 1부리그 축구단에 매력을 느끼는 기업들은 많다"고 일갈했다.
엄 대표가 여전히 재무전문가로서 능력을 인정받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확실한 건 서울 코칭스태프와 선수단, 팬들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는 점이다. 이러다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새 역사를 쓸 가능성도 있다. 2부리그 강등. 지금의 서울이 '절대 벌어질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돌이켜보니 엄 대표가 최전방에 나선 자리가 딱 한 번 있었다. 지난달 기성용 입단 기자회견장에서였다. 그는 기성용과 함께 연신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를 환하게 웃으며 받아들였다. 그는 역사의 한가운데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