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0월 19일 당시 김경문 NC 감독은 두산과의 플레이오프(PO) 2차전을 앞두고 뜻밖의 얘기를 꺼냈다. NC는 1차전을 0-7로 완패해 분위기가 한풀 꺾였지만, 김경문 감독은 "위안 삼는 게 있다"고 운을 뗐다. 이어 "올해가 처음이지만 이 정도로 좋아졌구나 싶어 뿌듯했다. (데뷔 후) 처음으로 큰 대회를 치르며 자신감도 생기고…, 그게 좋은 투수로 가는 길"이라고 한 선수를 칭찬했다. 왼손 스페셜리스트 임정호(30)를 향한 평가였다.
임정호는 그해 1군에 데뷔했다. 첫 시즌부터 필승조로 중용돼 무려 80경기(48이닝)를 소화했다. 정규시즌 일정(144경기)의 56%였다. 하루걸러 한 번씩 등판한 셈이다. 대부분 실점 위기 때 마운드를 밟았다. 당시 PO 1차전에서도 0-4로 뒤진 6회 초 1사 2루에서 등판해 오재원과 오재일을 연속 삼진으로 잡았다. 왼손 타자만큼은 어느 투수보다 잘 막아냈다. 선수 칭찬에 인색한 김경문 감독이 임정호를 언급한 이유다.
공교롭게도 임정호는 2015년의 위력을 잃었다. 2016년과 2017년 부침을 겪었다. 시즌 평균자책점 각각 5.40, 4.45로 높았다. 매년 40경기 이상씩 소화했지만, 투구 내용이 떨어졌다. 터닝 포인트는 2018년 1월 상무야구단(상무) 입단이었다.
상무에서 임정호는 투심 패스트볼(투심) 장착에 열을 올렸다. KBO 공식 야구통계전문업체 스포츠투아이에 따르면, 2017년 임정호의 투심 비율은 5%였다. 슬라이더(51%), 커브(12%)와 비교하면 비중이 작았다. 결정구가 아니라, 보여주는 구종에 불과했다. 임정호는 "상무에서 슬라이더와 반대로 움직이는 공을 던지고 싶어서 훈련했다. 경기 때 계속 던지면서 감을 찾았았다. 많이 던지며 연구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9월 NC에 복귀한 임정호는 180도 다른 투수가 돼 있었다. 올 시즌엔 투심 비율을 무려 35%까지 끌어올렸다. 상무에서 훈련한 대로 체인지업을 던지지 않고 투심과 슬라이더, 커브로만 타자를 상대한다. A 구단 전력분석원은 "왼손 투수 중에서 슬라이더를 못 던지는 투수는 거의 없지만, 투심은 다르다"며 "임정호의 투구 레퍼토리는 극과 극의 무브먼트 조합이다. 임정호의 릴리스포인트 높이는 1.47m(평균 1.77m·사이드암과 언더핸드 제외)로 낮아 사실상 사이드암에 가깝다. 투구폼도 희소성이 있다"고 평가했다. 올 시즌 그의 왼손 타자 피안타율이 0.198에 불과하다.
임정호는 왼손 타자를 상대할 때 슬라이더를 자주 던진다. 타자 바깥쪽으로 흐르며 떨어지는 공이다. 왼손 투수가 던지는 투심은 슬라이더와 반대로 왼손 타자 몸쪽으로 향한다. 스트라이크존 좌우를 활용할 수 있게 됐다. 김수경 NC 투수코치는 "슬라이더의 궤적과 반대되는 구종을 던지면 타자들의 대처가 힘들어지는 효과가 있다"고 했다. 여기에 커브를 조합해 구종 밸런스를 맞췄다. 왼손 투수의 투심은 오른손 타자를 상대할 때 더 효과적이기도 하다. 원포인트 릴리프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무대를 확장하는 좋은 '무기'가 될 수 있다.
또 다른 변화는 투수판(pitcher's plate)을 밟는 위치다. 임정호는 기존 1루 쪽 투수판을 밟고 투구했지만, 상무에서 3루 쪽으로 바꿨다. 그는 "3루를 밟으니 투구할 때 더 편해졌다"고 설명했다. NC 전력분석 파트는 "왼손 투수가 1루 쪽을 밟으면 슬라이더 각을 더 크게 줄 수 있다. 그러나 임정호는 자신이 편하게 던질 수 있는 방향으로 바꾼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제구에도 좋은 영향을 줬을 것"이라고 했다.
임정호는 17일 시작된 한국시리즈(KS) NC 불펜의 핵심 자원이다. 이동욱 NC 감독은 1·2차전에 위기마다 임정호를 마운드에 세웠다. 1차전 4-3이던 7회 초 1사 1루에서 등판한 그는 호세 미구엘 페르난데스를 유격수 병살타로 잡아냈다. 결정구는 상무에서 갈고닦은 투심(시속 137㎞)이었다. 8회 초에는 선두타자 김재환을 삼진 처리했다. 슬라이더와 투심을 교차해 던진 뒤 6구째 슬라이더로 헛스윙을 끌어냈다. 1이닝 1탈삼진 무실점.
2차전에선 1-3으로 뒤진 8회 초 등판해 최주환에게 선두타자 안타를 허용했다. 그러나 후속 김재환을 3구째 좌익수 플라이, 1사 2루에선 박세혁을 시속 135㎞ 투심으로 헛스윙 삼진을 유도했다. ⅔이닝 1피안타 1탈삼진 1실점. 뒤이어 등판한 임창민이 적시타를 허용해 책임 주자가 홈을 밟았지만, 임정호의 투구는 크게 흠잡을 곳이 없었다.
2017년 6월 김경문 감독은 임정호에게 "핀치에 몰렸을 때 왼손 강타자를 막아야 나이스 피칭이다. 그런 부분을 좀 더 노력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임정호는 이제 '핀치'에 몰려도 흔들리지 않는다. 더 단단한 투수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