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철 전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은 지난 14일 서울 잠실 종합운동장 주경기장에서 “최근 주치의로부터 대외 활동도 가능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상태가 호전됐다”고 말했다. 임현동 기자“올 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이래요. 그런데 그라운드를 밟는 순간 추운 줄 모르겠습니다. 제가 있어야 할 곳에 오니 몸이 뜨거워지나봐요.”
14일 오후 서울 잠실 종합운동장 주경기장. 유상철(49) 전 프로축구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은 차가운 공기를 크게 들이마셨다. 한낮에도 기온은 영하 5도(체감온도는 영하 11도)였지만, 유 감독은 아랑곳하지 않고 구석구석을 살폈다. 잠실경기장은 그에게 특별하다. 처음 태극마크를 다는 꿈이 현실이 된 장소이자, 기적 같은 승리를 숱하게 경험한 마법 같은 공간이다. 암 투병 중인 그는 그런 기적이 다시 한 번 일어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곳을 찾았다.
유 감독은 “1995년 디에고 마라도나의 보카주니어스와 한국 국가대표팀의 친선경기가 잠실에서 열렸다. 나는 마라도나와 유니폼을 바꾸는 행운까지 누렸다. 당시엔 영웅과 나란히 뛰는 게 기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살다보니 그보다 더 큰 기적이 필요한 일이 많더라”라며 웃었다.
유상철 감독은 지난해 췌장암 4기 진단을 받고도 시즌을 완주했다. 시즌 중반 인천 유나이티드에 부임해 1부 잔류를 이끌었다. [사진 프로축구연맹]유 감독은 지난해 10월 췌장암 4기 진단을 받았다. 최하위(12위)로 강등 위기에 처한 인천의 소방수로 부임하고 몇 달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췌장암은 4기 진단 후 평균 수명이 4~8개월, 5년 생존률은 약 1%에 불과하다. 유 감독은 암 투병 사실을 알리고 시즌을 완주했다. 팀은 극적으로 K리그1에 잔류했다. 유 감독은 지난해 12월 건강 문제로 사의를 표명했다. 계약기간은 1년 남은 상태였다.
코로나19 여파 속에서도 최근까지 13차례 항암치료를 받았다. 머리카락도 빠졌다. 유 감독은 “‘왜 나한테 이런 일이…’라는 생각에 많이 억울했다. 감기처럼 언제쯤 병이 낫는다고만 하면 오랜 시간도 버틸 수 있지만, 기약이 없어 육체와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유상철 감독이 자신의 완치를 응원 현수막을 든 일본 요코하마 팬들과 만났다. 유 감독은 요코하마의 레전드다. [사진 터치플레이]유 감독의 버팀목이 된 건 팬들의 뜨거운 응원이었다. 인천 팬들은 유 감독이 마지막 경기를 치르던 날 ‘남은 약속 하나도 꼭 지켜줘’라는 현수막을 꺼내들었다. 부임하며 약속했던 1부 잔류는 이뤄졌으니, ‘완치돼 다시 감독으로 복귀하겠다’는 두 번째 약속도 지켜달라는 의미였다.
2월 전주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전북 현대와 요코하마 마리노스(일본)의 아시아 챔피언스리그에 ‘할 수 있다 상철이형’이라는 걸개가 걸렸다. 요코하마 원정팬들의 현수막이었다. 요코하마(1999~2000, 03~04년)는 유 감독이 전성기 시절을 보낸 팀이다. 유 감독은 “팬들의 응원은 내가 포기하지 않은 이유”라고 강조했다.
태극마크를 처음 단 20대 시절 누볐던 잠실 주경기장을 찾은 유상철 감독. 임현동 기자 팬들의 기도가 하늘에 닿았을까. 유 감독은 최근 주치의로부터 “대외 활동도 가능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상태가 호전됐다.
유 감독은 팬들의 응원에 보답하기 위해 자신이 암과 싸우는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찍었다. 성탄절인 25일 유튜브 채널 터치플레이를 통해 방영되는 ‘유비컨티뉴(맘스터치 후원)’다. 유 감독의 별명인 ‘유비’와 영어로 ‘계속되다’라는 뜻의 ‘컨티뉴(continue)’를 합친 제목으로 ‘도전은 계속 된다’는 의미를 담았다. 유 감독은 자신의 축구 인생에 잊지 못할 사람과 장소를 찾아 힘을 얻는다는 내용이다. 유 감독은 “내가 암과 싸워나가는 모습으로 응원해준 사람들에게 보답하고 싶다. 또 암을 이겨내서 환우들에게 ‘저 사람도 하는데, 나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주고 싶다”고 말했다.
유상철 감독은 한일월드컵 첫 경기 폴란드전에서 골을 터뜨리며 승리를 이끌었다. 이 골은 4강 신화의 발판이 됐다. [중앙포토]유 감독을 보면 한일월드컵을 떠올리는 팬이 많다. 당시 대표팀 첫 경기였던 폴란드전에서 유 감독은 강력한 오른발슛으로 골을 넣어 한국의 월드컵 첫 승을 이끌었다. 4강 기적은 그의 발끝에서 시작된 셈이다. 인터뷰를 마치며 유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그거 아세요? 월드컵 4강이 췌장암 완치 확률보다 낮았어요.(웃음) 크리스마스의 기적이 있다면, 완치돼 다시 감독으로 그라운드에 서는 게 소원입니다. 물론 해낼 거고요. 유비컨티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