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배구 흥국생명의 이재영, 다영 자매와 OK금융그룹 송명근·심경섭은 ‘학폭’(학교 폭력) 논란이 불거지면서 코트를 떠났다. 발단은 피해자의 폭로였는데, 이들이 피해를 공개한 통로는 정부기관의 신고센터가 아니었다. 인터넷 커뮤니티, 그 중에서도 ‘네이트판’이었다.
‘네이트판’은 2006년부터 포털 네이트가 운영 중인 인터넷 커뮤니티다. 누구나 익명으로 고민이나 사회 문제 등 다양한 글을 올릴 수 있다. 여기에 댓글을 달거나 공감을 표시할 수도 있고, 관련 토론도 진행할 수 있다. 최근에는 이곳이 ‘학폭 폭로의 장’으로 떠올랐다.
스포츠계 인권 보호와 비리 근절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스포츠윤리센터가 있다. 고 최숙현 철인 3종 경기 선수 사망 사건을 계기로 지난해 8월 출범했다. 이곳에도 신고가 접수되기는 했다. 18일 센터 관계자에 따르면 지난해 9~12월 접수된 신고·상담 건수는 338건이었다. 가장 많은 분야는 폭력이었고, 신고·상담자로는 가족과 체육계 관계인이 많았다.
센터는 신고 접수 후 조사를 거쳐 심의위원회에서 ▶징계 요구 ▶수사기관 고발 ▶피해자 구제 조치 ▶환경 개선 권고 등의 조처를 한다. 지금까지 처리한 사건은 25건. 그 가운데 징계 결정까지 내려진 건 3건이다. 문제는 신고 후 심의위를 거치는 처리 과정이 더디다는 점이다.
한 올림픽 구기 종목A선수는 “최근 스포츠윤리센터에 부정 관련 사안을 신고했다. 하지만 결과가 언제쯤 나올지 몰라 답답하다”고 말했다. 김헌일 청주대 체육학과 교수는 “피해자는 당장 탈출이 시급할 텐데, 신고 후에도 계속 단계를 밟아야 한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 또 다른 관계 기관과 공조 시스템이 잘 이뤄지는지도 모르겠다”고 의문을 제기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피해자는 폭로 창구로 정부 기관 대신 ‘네이트판’으로 몰렸다. 특히나 사회적 관심이 집중되면서 폭로에 따른 파급력은 그야말로 폭발적이다. 게다가 익명 게시판을 채택하고 있어 신원이 드러날까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박선웅 고려대 심리학부 교수는 “문제가 반복돼도 ‘꼬리 자르기’만 하는 모습에, 스포츠계의 신뢰가 사라졌다. 글을 올리는 피해자 입장에서는 되도록 많은 이가 알게 되기를 원할 거다. 또한 보복을 우려해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블라인드 형태의 폭로를 선택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스포츠윤리센터 예산은 연간 53억1200만원이며, 인원은 이사장 등 27명이다. 조사 인력은 팀장 3명과 조사관 7명이며, 건당 수당을 받는 비정규직 전문 조사위원이 11명이다. 업무가 과중한 점도 있지만, 지난해 12월에는 센터 이숙진 이사장과 노동조합이 갈등을 빚기도 했다.
체육 철학자 김정효 서울대 외래교수는 “사건이 터지면 ‘기구’부터 만들 뿐, 구조적인 시스템 문제는 짚어보지 않는다. 사실 ‘스포츠윤리센터’보다 ‘스포츠윤리교육센터’를 먼저 만들었어야 했다"며 “코로나19임시선별소처럼, 사건이 터진 뒤 피해자가 신고하기만 기다리는 것 같다. 선제적 대응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배우 조병규의 ‘학폭’ 의혹을 제기한 16일 네이트판 글이 사실무근인 것으로 밝혀졌다. 익명에 기댄 허위고발로 애꿎은 피해자를 만들 수 있다. 김정호 교수는 “물론 허위고발은 객관적 조사를 거쳐 조처를 해야 한다. 그래도 먼저 피해자 중심으로 사안에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스포츠윤리센터 측은 “센터 출범 7개월 만에 성과를 내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아직 홍보가 덜 된 측면도 있다”며 “신고 대표전화가 1670-2876이니 이용해달라”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