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매치 데뷔전을 치른 기억이 여전히 생생해요. (손)흥민(29·토트넘)이 형, (황)희찬(25·라이프치히)이 형, (황)의조(29·보르도) 형 등등 쟁쟁한 동료들과 함께 선 것만으로 기가 죽더라고요. 흥민이 형이 슬며시 다가와 ‘괜찮아, 처음엔 다 그래’라며 툭 쳐주는데, 정말 고마웠어요. 흥민이 형처럼 의지할 만한 리더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프로축구 광주FC 공격수 엄원상(23)에게 지난해 11월 17일은 ‘축구 기념일’이다. 이날 카타르와 평가전(2-1승)에 후반 31분 교체 출전하며 꿈에 그리던 A매치 무대를 밟았다. 18일 광주축구전용구장에서 만난 엄원상은 “청소년 대표팀 시절 국제대회에 여러 번 나가봤지만, (A매치는)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긴장감을 경험하면서 한 걸음 더 성장한 것 같다”고 했다.
엄원상은 자타가 공인하는 ‘스피드 레이서’다. 100m를 11초에 끊는다. 속도만큼은 김인성(31·울산)과 함께 K리그 톱클래스로 손꼽힌다. 팬들이 붙여준 ‘엄살라(엄원상+모하메드 살라)’, ‘KTX’ 등의 별명도 빠른 발을 강조하는 수사 위주다.
프로 2년차이던 지난해엔 골 결정력이 향상됐다. 정규리그 23경기에서 7골(2도움)을 넣어 펠리페(12골)에 이어 팀 내 득점 2위에 올랐다. 광주를 창단 이후 처음으로 K리그1 상위 그룹(1~6위)에 올려놓았고, A대표팀의 부름을 받았다.
엄원상은 “A대표팀에 처음 합류했을 땐 나만 많이 부족한 것 같아 위축됐는데, 형들이 ‘너 정말 빠르구나’라고 칭찬해줘 용기를 얻었다. 그제야 동료 선수들의 장점을 분석하고 익힐 여유와 자신감이 생겼다”고 했다. 광주 구단 관계자는 “대표팀에 다녀온 이후 엄원상이 운동할 때 무섭게 집중한다”고 귀띔했다.
엄원상은 내성적이다.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속이 깊고 진중하다. 2019년 국제축구연맹(FIFA) 20세 이하(U-20) 월드컵에서 준우승한 직후 이강인(20·발렌시아)은 ‘누나에게 소개해주고 픈 동료를 꼽아달라’는 취재진의 질문에 엄원상을 지목했다. 엄원상은 “강인이가 U-20 대표팀에서 방을 함께 쓰는 동안 꼭꼭 숨겨 둔 내 매력을 찾아낸 것 같다. 언젠가 팬들에게도 나를 알릴 기회가 오길 기대한다”며 웃었다.
광주는 지난해 돌풍을 일으키며 6위에 올랐지만, 올해는 1부리그 잔류가 최우선 과제라는 게 전문가들의 냉정한 판단이다. K리그1 구단 중 가장 적은 예산 탓에 늘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광주 선수단 연봉 총액은 45억원. 군팀인 상무를 제외하고 K리그1 구단 중 가장 낮았다. 1위 전북 현대(169억원)의 26.6%에 불과했다.
엄원상은 “FC서울로 건너가신 박진섭(44) 감독님을 비롯해 주축 멤버 여러 명이 떠났으니 외부 시선으론 위기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선수들 생각은 다르다. 새 사령탑 김호영(52) 감독님을 중심으로 똘똘 뭉쳤다. 우선은 2부 강등을 피하는 게 먼저지만, 좋은 흐름을 타면 그 이상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어 “FC서울은 꼭 이기고 싶다. 광주가 건재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다. 내가 골을 넣은 뒤 박(진섭) 감독님이 어떤 표정을 지으시는지 살펴보겠다”는 말로 유쾌한 도발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