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예리 '나만 잘하면 된다'는 마음으로 정신없이 떠났던 미국. 무더운 더위와 싸워가며 정신없이 찍었던 작품은 단순히 소중한 추억을 넘어 더 정신없는 성과를 선물처럼 쏟아내고 있다. '기생충(봉준호 감독)'에 이어 북미 본토를 사로잡은 이방인들의 작은 영화. "마냥 얼떨떨 하다"는 소감을 남긴 한예리에게도 영화 '미나리(정이삭 감독)'는 첫 할리우드 진출작 이상의 의미로 남게 됐다.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스러운 K-배우들의 활약이다. 매 작품 최선을 다하는 노력으로 배우 한예리의 존재감을 높였던 한예리는 새로운 환경에서도 제 장기를 마음껏 펼쳤다. 낯선 미국 땅에 정착한 한국 이민자 1세대 모니카는 낯선 현장에 선 한예리의 현실과 꼭 닮아있던 캐릭터. 미국 정착을 꿈꾸는 남편의 아내, 두 아이의 엄마, 그리고 엄마의 딸로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맡아야 하는 역할을 완벽히 소화했다.
"다시는 겪지 못할 수도 있는 경험과 사람을 준 영화다"고 '미나리'에 대한 애정을 표한 한예리는 "과정내내 충만하고 기분 좋은 에너지를 받았다. '미나리'와 배우들에 대한 대외적 기대감도 잘 알고 있지만 난 여기서 멈춘다고 해도, 지금까지 이뤄낸 것 만으로도 진심으로 행복하다"며 "그저 이 작품이 국내 관객들에게도 아름답고 따뜻하게 기억되길 바란다"고 진심어린 애정을 드러냈다. 한예리
-'미나리'의 행보가 대단하다. "시작부터 제2의 '기생충'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지금까지도 부담스럽기는 하다.(웃음) 어떤 성과 뿐만 아니라 관객 분들의 반응에 대한 부담감과 궁금증도 크다. 전혀 다른 결의 영화이기 때문에 '미나리'는 '미나리'의 매력으로 온전히 즐겨 주시길 바란다."
-아카데미시상식 주연상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데. "전혀. 절대!(웃음) 물론 작품이 잘되고 있는 것은 기분 좋지만, 지금도 (내가)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만큼 많은 상을 받았고, 많은 분들이 모니카에 이야기 해 주신다는 것 만으로도 좋다."
-여러 의미로 '미나리'에 대한 애정이 남다를 것 같다. "진심으로 각별하다. 다시는 못 올지 모르는 추억과 사람을 선물해준 작품이다. 함께 하는 과정내내 충만하고 기분 좋은 에너지를 받았고, 좋은 사람들을 많이 얻었다. '이런 일이 또 올 수 있을까?' 생각도 들 정도라 너무 각별하다."
-배우 한예리의 향후 행보에도 영향을 끼칠 것 같은데. "아직 가야할 길이 많이 남아있는 배우이기는 하지만, 지금까지를 되돌아 봤을 때도 어떤 전환점이 되어주지 않을까 생각한다. 내가 앞으로 작품을 선택하는데 많은 영향을 줄 것이고, 또 다른 분들이 나를 선택하는데도 많은 영향을 주는 영화가 되지 않을까 싶다."
-'미나리' 이후 할리우드 내 관심도 쏟아질텐데 추진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있나. "으하하. 아직 아~무것도 없다.(웃음) 그쪽 시장에서 관심이 있을 수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향후 행보는 정해진 것이 없다. 지금은 '미나리'와 관련된 모든 일들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지금의 상황과 결과들이 추후 원하는 방향으로 가게 되지 않더라도 전혀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너무 만족하고 행복하다. 다음 작품은 한국 작품을 하게 될 것 같다."
한예리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미나리'의 전세계적 사랑을 예상했나. "그런 예상을 했다면 내가 뭐라도 했을 것이다. 러닝개런티라도 걸고.(웃음) 정말 전혀 예상 못했다. 지금도 얼떨떨하고 우리 팀 내부에서도 '마냥 신기한 일'이라 생각하고 있다."
-사랑받는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나. "'미나리'는 이민자 가족에 대한 이야기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한번쯤은 겪어 봤을 삶의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보편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고, 그 안에 힘들지만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순간 순간들이 잘 기록돼 있어 그 점에 공감해 주시는 것 같다."
-모든 세대가 등장하는 만큼, 모든 세대의 관객들이 반응하는 것 같기도 하다. "맞다. 또 누구 하나 나쁘거나 못되거나 이기적이거나 그런 캐릭터가 없다. 감정을 강요한다던지, 받는다던지 그런 느낌도 없다. 그저 좀 더 담담하게 이 이야기들을 '진짜 이런 일이 있었어'라고 들려주는 것 같아서 많은 분들이 영화를 아름답게 보고 사랑해 주시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한예리가 '미나리'에 매료 된 지점은 무엇인가. "나는 시나리오보다 아이작 감독님께 매료가 됐던 것 같다.(웃음) 번역본으로 시나리오를 받았고, 이후 감독님과 모니카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유년 시절과 부모님을 바라봤던 기억들을 떠올리며 서로의 추억을 꺼내 보는 시간을 가졌다. 감독님과 나의 어린시절 기억이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부분을 모니카를 통해 만들어 보면 좋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감독에 대한 신뢰가 상당한 것 같다. "조금만 이야기 해보면 모두가 느끼겠지만, 감독님 자체가 너무 너무 좋은 분이다. '그냥 이 사람과는 뭐든 했으면 좋겠다. 하면 재미있고 즐겁겠다. 행복하겠다'는 마음이 들어 아이작과 같이 하고 싶었던 기억이 더 크게 남아있다."
-해외 촬영에 어려움은 없었나. "다른 것보다 날씨가 정말….(웃음) 더워도 너무 더웠다. 촬영 회차도 많지 않았고, 당연히 정해진 스케줄에 맞춰 움직여야 했기 때문에 모두가 고생했고, 모두가 노력했다. 아역 친구들은 너무 달아 오른 자동차에 손을 데이기도 했다. 진짜 한 가족이 되어가는 기분을 느꼈다."
-고국 돌아오고 싶었던 순간은. "촬영이 25회 차 안에 끝났다. 너무 짧은 시간이라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까지도 못했다.(웃음) 오히려 '우리에게 시간이 조금만 더 있다면, 3회 차만 더 있었으면' 싶었다. 집중했던 시간들이 길게 느껴지지 않았을 뿐더러 나름 더 잘 해내고 싶었던 것 같다." 한예리
-가족에 대한 애정을 누구보다 강하게 표출하는 모니카다. 아무리 힘들어도 모니카로 인해 절대 가정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도 생긴다. 여리지만 강인한 모니카를 어떻게 이해하고 바라봤나. "나라면 트레일러 앞에 아이들이 있을 때 다른 곳으로 휙 갔을 것이다. 나는 그런 여자다.(웃음) 하지만 모니카는 아니다. 가정의 해체를 바라지 않는다. 아예 생각도 안한다고 해야 할까? 난 모니카가 이별 선언을 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치고 박고 싸워도 모니카는 한번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 같다. 그저 본인이 힘든걸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을 버티고 버티다 결정적 순간에 내비치는 것이다. '힘든 상황을 바꿔 줄 수는 없겠냐'는 뜻. 내가 봤을 땐 모니카가 제이콥을 더 사랑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하."
-모니카를 연기하며 새롭게 느낀 지점들이 있다면. "그 시대를 살았던 많은 여성들이 생각났다. 우리 엄마를 포함해 또래 친구들의 어머니와 연배가 비슷할 것이다. '이 시대 때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살아가는 과정들도 쉽지 않았겠구나. 경제적 기반이 잘 마련되지 않았다면 더 많은 고난이 있었겠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 제이콥처럼 이제 막 자아를 실현하고 꿈을 꾸는 사람들 같은 경우에는 부모와 아이의 성장이 동시에 이뤄지는 성장통을 겪어야 했을 것이다."
-실제 어린시절이 떠올랐다고 했다. "내가 부모님과 있었던 시간 또한 서로의 성장에서 비롯된, 그 가운데 '어려움과 힘듦이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아무래도 그 세대를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부분이 생겼다. 서로 너무 어렸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최선을 다 했다."
-혹시 어머니는 영화를 보셨나. "아직 못 보셨다. 개봉하고 보게 되신다면 나 역시 엄마에게 많은 것들을 물어보고 싶다."
-모니카와 비교했을 때 현실에서는 어떤 딸인가. "나는 현실적인 딸인 것 같다. 장녀니까. 한국형 장녀의 전형적 인물이다. 내.가. 하하. 그래서 좀 뭔가를 더 해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살았던 것 같다."
-순자(윤여정)와의 고추가루 신이 많은 관객을 울렸다. "모니카 입장에서는 순자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삶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순자도 '내 딸이 미국에서 번듯하게 잘 살 것이다' 생각했을텐데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것이니까. 엄마를 봐서 너무 기쁘고 좋은데, 동시에 미안하고 속상한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순간적으로 느껴진 많은 감정들이 있었지만 현장에서는 최대한 단순하고 심플해지려 했다."
한예리 -개인적으로 인상깊었던 장면이 있다면. "주차장에서 모니카와 제이콥(스티븐 연)이 이야기 하는 신. '모니카가 얼마나 무거운 마음으로 그 이야기들을 했을까' 연기를 하면서도 계속 울컥했다. 솔직히 울기도 많이 울었다. 한예리는 울었는데, 모니카는 울지 않을 것 같아서 꾹꾹 참으며 연기했다. 내가 마음을 많이 썼던 장면이다."
-윤여정과의 힘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어서 좀 조심스럽지만, 다 같이 누워 자고 있는 우리들을 한참동안 바라보면서 점점 클로즈업으로 들어가는 선생님의 얼굴을 보면서 '와. 이게 배우의 힘인가?' 싶었다. 사실 선생님은 뭔가를 하지 않아도 너무 자연스러웠다. 그 눈빛의 힘과 주름의 깊이가 너무 좋았다."
-아역 배우들과는 어땠다. "두 친구 각각의 매력이 있다. 앨런은 당연히 너무나도 귀여웠다. 쉽지 않은 현장이었음에도 많이 애써줬고, 최선을 다했다. '그럼 앨런은 계속 연기 할거야? 배우 할거지?' 우스갯소리로 말하면 '너무 힘들다. 덥다. 못할 것 같다'고 하더라.(웃음) 솔직하고 표현도 거침없다. 계속 쭉 그렇게 자라줬으면 좋겠다."
-엔딩에 대한 생각은 어떤가. "나는 좋다. 안도했다. 어떤 분들은 '뭐야, 저렇게 끝나?' 할 수도 있지만 나는 '다행이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또 살아가는구나….(웃음) 너무 좋은 엔딩이고, 그 엔딩에 감사하다. '아이작 감독의 한 순간이었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나중에 자녀들이나, 후손들이 꼭 봤으면 하는 작품이 있다면.
"70대에 받아야 하는 질문 아닌가? 하하. 정말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고민을 좀 해보겠다. 아직 아이 생각도 해본적이 없어서 그런지…. 꼭 어느 한 작품을 꼽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난 내 필모그래피를 순서대로 보여주고 싶은 마음은 있을 것 같다. 출연작에 내 성장이 들어가 있는 것 아닌가. 나이드는 과정도 보여질테고. 이런 실수도 했고, 이런 얼굴도 있었고, 보여주고 싶지 않은 실수가 있었다면, 자랑하고 싶은 순간도 있을 것이다. 나를 궁금해 한다면 함께 보면서 이야기하고 싶다."
-생각해 둔 수상소감은 있나. "아이고~ 아이고~ 아니요. 전혀요.(웃음) 지금까지 받은 상들도 실질적으로 손에 쥔 것이 없어 실감이 안 난다. 할리우드 작품 참여와 지난해, 또 올해의 좋은 스타트를 '미나리'로 모두 끊게 되는 것 같아 기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