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했던 여자 배구 한일전. 김연경(33)의 허벅지엔 혈관이 터진 듯 붉은 상처 자국이 선명했다. 김연경의 플레이와 몸짓 하나하나가 보는 이들을 감동하게 한 경기였다.
한국 여자배구 대표팀은 지난 31일 일본 도쿄 아리아케 아레나에서 열린 2020 도쿄올림픽 여자 배구 A조 조별리그 4차전 '숙적' 일본과의 경기에서 세트 스코어 3-2(25-19, 19-25, 25-22, 15-25, 16-14)로 이겼다.
한국이 이날 승리로 8강행을 확정해 큰 의미가 있었지만, 한일전에서 짜릿한 승리를 거뒀다는 점은 금메달 이상의 카타르시스를 선물해줬다. 특히나 같은 시간대에 열린 한국 남자 축구 8강전(2-6 패, 멕시코)와 야구(2-4 패, 미국)는 모두 졌지만, 여자 배구가 구기 종목의 자존심을 지켰다.
경기 후 누리꾼 사이에서 김연경의 존재 그 자체가 화제의 중심이었다.
한국뿐이 아니다. 일본 ‘야후 재팬’의 실시간 채팅방에서도 배구 경기를 지켜보던 일본인들마저 “나도 김연경한테 ‘정신 차리라’는 말을 한번 들어보고 싶다”, “일본에서 뛰었을 때도 좋아했는데 역시 카리스마가 대단하다”는 칭찬글이 올라왔을 정도다.
사람들이 가장 먼저 주목한 것은 김연경의 경기력이다. 김연경은 일본전에서 양팀 최다인 30점을 올렸다. 국제배구연맹(FIVB)에 따르면 김연경은 올림픽 최초로 4차례나 한 경기에서 30점 이상을 기록한 선수가 됐다.
스테파노 라바리니 감독은 김연경에게 공격이 몰리는 것을 경계했다. 30대 중반에 접어든 김연경의 체력을 안배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김연경의 대각선에 서는 레프트도 높이와 공격력이 좋은 박정아를 기용했다. 라이트 역시 부상에서 회복된 지 얼마 안 된 김희진을 붙박이로 썼다.
그러나 기록에서 김연경의 존재감은 확실히 드러난다. 김연경은 조별리그 4경기를 마친 1일 현재 득점 공동 3위(78점)에 올라 있다. 1~3위인 티아나 보스코비치(세르비아·103점), 파올로 에고누(이탈리아·82점), 조던 톰슨(미국·78점) 등은 공격에 집중하는 라이트지만 김연경은 서브 리시브에도 가담하는 레프트다.
김연경은 디그(스파이크를 받아내는 것) 3위(47개), 리시브에서도 4위(정확 65개)에 올라 있다. 블로킹도 미들블로커들 못잖게 많은 8개를 잡아 17위에 올라 있다. 한국 팀에선 양효진(10개) 다음으로 많다. 공·수에서 완벽한 '토탈 패키지'란 표현이 딱 어울린다.
또한 한일전에서는 김연경의 상처도 화제가 됐다. 김연경은 오른쪽 허벅지에 혈관이 터진 듯한 붉은 상처가 보인다. 사진상에도 또렷하게 보일 정도였다. 이 상처는 경기가 진행될수록 더 커졌다.
김연경은 지난해 1월 올림픽 아시아 최종예선에서 복근이 찢어지는 부상을 입고도 진통제를 맞고 출전했다. 그 정도로 김연경에게는 올림픽 메달이 간절하다. 김연경은 2012년 런던, 2016년 리우에서 모두 메달 획득에 실패했다. 김연경은 “나의 마지막 올림픽”이라며 도쿄에서 모든 것을 불살라 메달을 따겠다는 각오를 밝힌 바 있다.
한 점, 한 점에 절실하고 선수단 전체를 독려하는 김연경의 카리스마 역시 대단했다.
김연경은 일본전 내내 "해보자. 후회하지 말고"라고 선수들을 독려했다. 5세트 9-11로 뒤진 상황에서 "하나만 더하면 기회 온다, 얘들아"라고 한 주문이 이뤄졌다.
12-14 게임 매치 포인트로 몰린 상황에서 한국이 한 점을 따라붙었다. 이어 후위에 있던 김연경은 13-14에서 블로커 맞고 튀긴 공을 어렵게 걷어 올렸다. 이어 레프트 박정아가 상대 코트에 내리 꽃아 동점이 되자, 김연경은 무릎을 꿇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오른 주먹으로 코트를 내리치며 온몸으로 기쁨을 만끽했다. 이어 15-14에서 박정아의 공격이 성공하자 김연경은 어린아이처럼 펄쩍펄쩍 뛰어다녔다.
2012 런던올림픽 동메달결정전에서 일본에 아쉽게 패한 경험을 안고 있는 김연경은 "일본전은 감정에 휩쓸리는 경기가 많다. 짜증 나는 느낌도 많이 난다. 감정 조절을 안 하면 일본전은 어렵다"며 "일본 여자배구가 잘하기도 하고 항상 부담이 있었는데 부담을 털어내고 이겨서 기쁨은 두 배 이상, 서너 배"라고 기뻐했다.
극적으로 일본을 이긴 직후, 한국 선수단은 둥글게 모여 ‘강강술래’를 하면서 자축했다. 이때 뒤늦게 뛰어온 라바리니 감독이 금세 선수단 안에 끼어든 반면, 세자르 에르난데스 코치가 자리를 잡지 못하자 김연경이 그 정신없는 와중에 에르난데스 코치에게 자리를 만들어주며 챙겼다.
김연경은 남은 경기 각오에 대해 "세르비아전을 어떻게 할지 모르겠지만, 8강 상대가 정해지면 그에 맞게 준비해서 한 번 기적을 일으키도록 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