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파노 라바리니(42·이탈리아·사진) 감독이 이끈 한국 여자배구 대표팀이 도쿄올림픽 4위에 오르자 많은 이들은 거스 히딩크(75·네덜란드) 전 축구 대표팀 감독을 떠올렸다. 2002 한일 월드컵에서 4강 신화를 이룬 히딩크는 관행을 깨고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한 혁신적 리더였다.
라바리니 감독은 선수들에게 친구처럼 다가섰다. 그러면서도 단단한 리더십을 가졌다. 상대에 대한 예리한 분석 덕분이었다. 여느 스포츠 감독과 달리 선수로 뛴 경력이 그에겐 없다. 16세 나이에 유소년 배구팀 어시스턴트 코치가 됐고, 이후 이탈리아 청소년 대표팀을 거쳐 프로팀 코치가 됐다. 중앙일보는 이탈리아로 돌아간 라바리니 감독과 서면 인터뷰를 했다.
라바리니 감독은 “어린 시절 내가 다니던 학교의 배구 코치를 동경했다. 그가 보여준 배구에 대한 열정, 선수들과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을 보며 이 일에 매료됐다”고 말했다.
부드러운 리더십은 그가 선수 출신이 아니기에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라바리니 감독은 “난 운동에 서툴렀다. 하지만 도전을 좋아하기 때문에 스포츠에서 성공하는 꿈을 가졌다. ‘두뇌’와 ‘공감’으로서 선수들이 성공하도록 돕고, 그걸 조금이나마 나누는 게 재미있었다”고 했다.
대표팀을 맡기 전 그가 파악한 한국 선수는 김연경(33)과 이재영(26) 정도였다. 라바리니 감독은 "이탈리아에서 선수 생활을 한 김호철(66) 전 배구 대표팀 감독도 안다. (이탈리아에서 뛰는) 그의 딸(김미나)도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동안 한국은 세계 배구의 흐름에 뒤처진다는 지적을 받았다. 그러나 라바리니 감독 부임 후 빠르게 변화했고, 도쿄올림픽 본선 티켓도 따냈다. 하지만 도쿄올림픽이 코로나19로 미뤄지는 악재를 맞았다. 그 사이 주전 선수 2명(이재영·이다영)이 불미스러운 일로 대표팀에서 탈락하는 일도 있었다. 라바리니 감독은 "팀의 균형을 찾고, 내가 원하는 플레이에 맞는 선수들과 플랜B를 결정해야 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라바리니 감독은 "올림픽에서 가장 중시한 부분은 성공에 대한 믿음, 서로에 대한 신뢰였다. 선수들과 대화하면서 매 순간의 목표를 설명하고, 팀워크를 최우선으로 하는지 확인했다”고 전했다.
조별리그에서 일본을 꺾자 그는 코트로 뛰어나가 선수들과 강강술래를 하며 환호했다. 라바리니 감독은 "승리는 다 좋지만, 일본전에서 더 환호했다. 특별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우리의 목표인 8강을 이룬 데다, 한국인들이 일본전에서 느끼는 강한 감정을 알고 있었다”고 털어놨다.
라바리니 감독이 한국 대표팀을 맡은 건 김연경 덕분이었다. 2018년 브라질 미나스 테니스 클럽 감독이었던 라바리니 감독은 세계클럽선수권 우승을 이끌었다. 당시 그는 결승에서 김연경이 뛰고 있던 엑자시바시(터키)를 이겼다. 이 경기에서 두 고수는 서로를 알아봤다. 김연경의 추천으로 그는 대표팀 감독 후보군에 포함됐다.
라바리니 감독은 "전에도 김연경을 알고 있었다. 몇 년간 최고의 선수였기 때문이다. 그의 첫인상은 ‘매우 숙련되고, 경기의 흐름을 혼자 바꿀 수 있는 선수’였다. 팀 동료, 코치, 심판, 관중은 물론 상대편까지 그를 존중(respect)한다는 게 특히 인상적이었다”고 회상했다.
김연경이 대표팀에서 은퇴한다는 건 감독에게도 아쉬운 일이다. 그는 "개인적으로 김연경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며 "배구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감동적인 동시에 슬픈 순간”이라며 "김연경이 우리 스포츠(배구)에 준 것들에 감사한다. 국제대회에서 그가 보여준 동작 하나하나는 환상적인 쇼였다. 특별하고 엄청난 선수였다.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연경 은퇴와 함께 여자배구는 세대교체를 앞두고 있다. 라바리니 감독은 "여자 배구는 더 격렬하고 빨라지고 있다. 국제대회에서 더 높은 위치에 오르려면 새 흐름에 맞는 선택을 빠르게 내려야 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한국 여자배구에서 한국인의 특질을 느꼈다고 그는 말했다. 라바리니 감독은 "한국에 온 첫날부터 한국인들이 정말 잘 뭉치고, (자신들을) 자랑스러워한다는 걸 느꼈다. 우리 팀의 단결력은 보통의 한국인들 모습과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가 상대보다 경기력이 떨어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 우린 팀으로 뭉쳤기에 성공을 거뒀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대한배구협회는 계약이 만료된 라바리니 감독에게 재계약을 제안했다. 그의 연봉(10만 달러·추정)이 올라갈 가능성도 있다. 다만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클럽팀과 대표팀 일을 병행하는 게 쉽지는 않다.
지난 시즌 노바라를 유럽배구연맹 챔피언스리그 3위에 올려놓은 라바리니 감독은 올해도 같은 클럽을 이끈다. 12월 세계클럽선수권에도 출전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 대표팀과 재계약에 관한 질문에 라바리니 감독은 "고맙게 생각한다. 우리가 열심히 해왔다는 걸 인정해준 것”이라며 즉답을 피했다.
라바리니 감독은 "(한국 대표팀을 맡은 지난 2년 동안) 훌륭한 경험을 했다. 존경하는 이들과 여정을 함께할 수 있어 감사하다. 한국 전체가 우릴 따뜻하게 응원해준다는 기분을 느꼈다”고 했다. 그는 "멋진 팀과 함께 어마어마한 업적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한 사람으로 나를 기억했으면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