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현이가 생후 7개월 때였어요. 제 등 뒤의 ‘베이비 캐리어’에 앉히고 산에 올라갔죠. 정상에 도착해 채현이를 보니까, 배냇저고리와 기저귀가 다 젖어 있더라고요. 이슬 맞은 나뭇잎과 가지를 피하려고 제가 고개를 숙이며 등반했거든요. 그런데 채현이가 이슬을 다 맞은 걸 몰랐죠.”
스포츠클라이밍 국가대표 서채현(18)을 그의 아버지 서종국(48)씨가 서울 영등포에서 운영하는 실내암벽장(서종국 클라이밍)에서 만났다. 지난달 도쿄올림픽 현장을 취재했던 기자들 사이에서 “서채현이 세 살 때부터 산에 올랐다”는 말이 나왔다. 확인 결과 ‘세 살’도 아닌 ‘생후 7개월’이었다. 서종국씨는 당시 딸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채현이가 세 살 때는 이미 클라이밍을 시작했죠”라며 웃었다.
어머니 전소영(48)씨는 “2000년 산악회 등산 교실에서 남편을 만나 2년 뒤 결혼했다”고 전했다. 전씨는 스포츠클라이밍 국가대표 출신이고, 서종국씨는 아이스클라이밍 국가대표다. 서채현은 클라이밍에 최적화한 유전자를 타고났고, ‘조기 교육’까지 받은 셈이다.
아빠 등에 업혀 새벽 이슬을 맞았던 귀여운 아이는 18년이 흘러 ‘거미 소녀’가 됐다. 서채현은 지난달 도쿄올림픽 스포츠클라이밍 콤바인에 최연소 선수로 출전했다. 동메달까지 딱 세 걸음, 홀드(암벽의 돌출부) 3개가 모자랐다.
콤바인은 ▶스피드 ▶볼더링 ▶리드의 세 종목 순위를 곱한 포인트로 순위를 정한다. 포인트가 낮을수록 순위가 높다. 서채현은 예선 20명 중 2위에 올랐다. 8명이 나선 결선에서 스피드 8위, 볼더링 7위를 기록했다. 마지막 리드(15m 암벽을 6분 안에 높이 오르기)에서 1위를 차지했다면, 동메달을 따는 거였다. 야냐 가른브레트(슬로베니아, 37+개)보다 더 높은 홀드를 잡아야 했는데, 마지막 주자 서채현은 35번째 홀드를 잡고 36번째 홀드를 향해 손을 뻗다가 떨어졌다.
서채현은 “함성만 듣고 야냐가 리드 완등을 했다고 착각했다. 둘 다 완등하면 더 빨리 올라간 선수가 1위가 된다. 그래서 오버 페이스를 했다. 중간에 한 번 손을 털고 쉬었다면, 충분히 갈 수 있었는데…”라며 아쉬워했다. 서채현은 리드 2위를 기록했지만, 최종 8위(8X7X2=112점)에 그쳤다. 야냐가 5점(5X1X1)으로 금메달을 땄다.
서채현은 “야냐가 예선 리드에서 부진했다. 그래서 ‘야냐도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했는데, 결선에서 그는 ‘넘사벽(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부럽기도 했고, 야냐 같은 선수가 되고 싶어졌다”고 말했다.
올림픽 믹스트존에서 눈물을 쏟은 서채현은 엄마와 통화하며 두 시간 내내 엉엉 울었다고 한다. 서채현은 “볼더링 과제가 너무 어려워 걱정했다. 경험이 있었다면 처음에 잘못 생각했더라도 고쳐나갔을텐데…. 코로나19 여파로 볼더링 국제대회를 한 번(2019년 출전)밖에 출전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거미 소녀’는 아쉬움을 툭 털어냈다. 도쿄에서 귀국해 이틀만 쉰 서채현은 다시 훈련에 돌입했고 국제대회에 나섰다. 지난 5일 슬로베니아 크란에서 열린 국제스포츠클라이밍연맹 월드컵 8차 대회에서 리드 준우승을 차지했다. 그는 또 16일 열리는 세계선수권대회를 위해 러시아 모스크바로 떠났다.
도쿄올림픽 후 서채현의 인스타그램 팔로워는 1만 5000명으로 늘었다. “최선 다했으니 금메달”이라는 댓글이 제일 기억 남는다고 했다. ‘암벽 여제’ 김자인(33)은 서채현에게 스테이크를 사주며 “처음이니까 괜찮다. 너무 잘했다”고 격려해줬다.
서채현은 “많은 분이 ‘스파이더 걸’이라고 불러주신다. 거미처럼 잘 올라간다는 의미의 별명이라 맘에 든다. 실제로 거미를 보고 ‘저렇게 쉽게 올라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며 “영화 ‘스파이더맨’ 시리즈를 모두 봤다. 배우 톰 홀랜드가 좋다. 만약 스파이더맨처럼 거미줄을 쓸 수 있다고 상상하면 스포츠클라이밍의 매력이 없어지지 않을까”라고 되물었다.
서종국씨는 “채현이가 얼마 전 ‘올림픽이란 큰 대회를 겪어보니, 월드컵은 긴장도 안 된다’고 하더라. 도쿄에서 금메달을 땄다면 자만하고 덜 노력했을지 모른다. 걸림돌에 넘어졌으니 털고 일어나면 된다. (2024년) 파리올림픽을 위한 전화위복이 될 것”이라고 했다.
파리올림픽에서는 콤바인이 ▶리드와 볼더링 ▶스피드로 분리된다. 스피드가 취약한 서채현에게 유리한 방식이다. 그는 “스피드는 도쿄올림픽이 마지막 경기였다. 이제 리드는 안정적인 것 같다. 볼더링을 보완하면 충분히 (메달을) 욕심낼 만하다. 파리에서는 더 높이 올라갈게요”라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