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아들, 야구 천재, 종범신(神). 이토록 화려한 별명으로도 모두 담을 수 없을 만큼 특별한 재능과 퍼포먼스를 보여준 선수. 한국야구 역대 최고의 '5툴 플레이어' 이종범(52) 얘기다.
일간스포츠가 선정한 프로야구 40주년 올스타 유격수 부문에 이종범이 선정됐다. 20대부터 50대까지 세대별 야구인 10명씩 총 40명이 참여한 투표에서 총 28표를 획득, 2위 김재박과 박진만(이상 4표)을 크게 따돌렸다. 한국야구 계보를 잇는 역대 유격수 중에서도 단연 으뜸으로 꼽혔다.
이종범은 안정감 있는 수비력을 갖추는 게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여겨졌던 유격수의 평가 기준을 바꿔놓았다. 프로 데뷔 첫 시즌부터 폭발적인 화력으로 팀 공격을 주도했다. 야수 한 명이 경기 흐름과 결과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수비력도 일품이었다. 특히 강한 어깨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명장면을 만들어냈다. 야구계에서는 "투수는 선동열, 타자는 이승엽, 야구는 이종범"이라는 말이 있다. 이종범의 전천후 능력에 대한 극찬이다.
이종범과 선수 생활을 함께했던 후배들도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타이거즈 직계 후배였던 김종국 KIA 감독은 "공·수·주를 모두 따졌을 때 가장 뛰어난 유격수는 이종범 선배"라고 했다. 선수 생활 말년(2002~2003) KIA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장정석 KIA 단장도 "그야말로 '야신(야구의 신)'이다. 리그 최정상급을 넘어 독보적이었다. 야구를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라고 돌아봤다.
이동욱 NC 다이노스 감독도 "수비를 잘하는 다른 후보들이 있어서 고민했다. 그래도 타격이나 도루 등 여러 임팩트에서 이종범이 선배가 제일"이라고 했다. 조원우 SSG 랜더스 벤치코치, 이대진 SSG 투수 코치는 이종범을 역대 최고 유격수로 꼽으며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라고 입을 모았다.
1993년 1차 지명으로 해태 타이거즈(현재 KIA)에 입단한 이종범은 데뷔 시즌부터 득점(85개) 1위, 안타(133개)와 도루(73개) 2위, 홈런(16개) 4위에 오르며 리그를 흔들었다. 신인 최다 도루를 기록하며 '바람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신인상은 타율 1위(0.341), 홈런 2위(23개)에 오른 양준혁(당시 삼성 라이온즈)에게 내줬지만, 삼성과의 한국시리즈(KS)에서 타율 0.310 7도루로 맹활약하며 해태의 우승을 이끌었다. KS 최우수선수(MVP)도 그가 차지했다.
1994년은 전설로 회자된다. 이종범은 124경기에서 타율 0.393(499타수 196안타) 113득점 77타점 84도루를 기록하며 정규시즌 MVP를 수상했다. 타율은 프로야구 출범 원년 백인천이 기록한 0.412에 이어 역대 2위에 자리했다. 최다 안타는 당시 신기록이었다. 84도루는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야구팬은 4할 타율, 200안타, 100도루를 향해 도전하는 이종범의 레이스에 열광했다.
리그 최고의 선수로 올라선 이종범은 1997년 다시 한번 역대급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정규시즌 타율 0.324 30홈런 64도루를 기록했다. 도루 1위, 홈런 2위에 올랐다. 후반기 홈런 페이스가 떨어진 탓에 이승엽(32개)에게 타이틀을 내줬지만, 홈런왕-도루왕 동시 석권을 노리며 다시 한번 리그를 달궜다. 역대 두 번째로 30홈런-30도루 클럽에 가입하기도 했다. 아직도 이 기록을 해낸 유격수는 이종범이 유일하다. LG 트윈스와의 KS에서는 승부처마다 출루와 도루, 홈런과 호수비를 선보이며 해태의 9번째 우승을 이끌었다. 개인 두 번째 KS MVP도 수상했다.
국내 무대를 평정한 이종범은 1998시즌을 앞두고 주니치 드래건스와 계약하며 일본 리그에 진출했다. 초반 경기력은 좋았지만, 이내 일본 야구 특유의 '현미경' 분석에 고전했다. 한신 타이거스전에서는 상대 투수의 공에 오른 팔꿈치를 맞고 골절상을 입기도 했다. 복귀 후에도 기대한 성적은 내지 못했다. 결국 2001년 8월 해태에서 KIA로 구단명이 바뀐 친정팀에 복귀한다. 이종범은 실패를 딛고 다시 일어났다. 포지션을 외야수로 옮겼지만, 호쾌한 타격과 현란한 주루 능력은 여전했다. 2003시즌에는 50도루를 기록하며 도루왕에 복귀했고, 안타(165개)도 2위에 올랐다. 일본 진출 전만큼 뛰어난 성적은 내지 못했지만, 여전히 리그 정상급 타자로 평가받았다.
만 서른다섯 살이 된 2005년 이후에는 장타력이 떨어졌다. 하지만 내리막을 타면서도 존재감을 보여줬다. 2006년 3월 열린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대회에서는 대표팀 주장을 맡아 한국의 4강 진출을 이끌었다. 숙적 일본과의 2라운드 3차전 8회 극적인 2타점 적시타를 치며 2-1 승리 주역이 됐다. 서른아홉 살이었던 2009년에는 역대 두 번째로 통산 500도루를 넘어섰고, SK 와이번스(현재 SSG)와 KS에서는 1차전 결승타 등 선수단의 버팀목 역할을 해내며 타이거즈 구단 역대 10번째 KS 우승에 기여했다.
이종범의 등 번호 7번은 타이거즈 구단 영구결번으로 남았다. 현재 프로야구를 이끄는 후배들에게 이종범은 이미 전설이다. KT 위즈 베테랑 박경수는 "역대 유격수 중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했다. 키움 히어로즈 내야수 김혜성과 NC 투수 송명기도 "그야말로 레전드"라고 했다. 리그 최고 타자로 성장한 이종범의 아들 이정후(키움)는 아버지를 대한 존경심을 감추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