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러시아가 제작한 영화 더 매치(The Match)의 한 장면. 우크라이나는 이 영화가 소련의 선전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이유로 몇 달 동안 개봉을 막았다. 한편 이 스토리에 영감을 받은 할리우드도 연합군 포로와 독일의 축구 시합을 그린 ‘승리의 탈출’을 제작했다. 이 영화에는 마이클 케인, 실베스터 스탤론과 축구 황제 펠레 등이 출연해 대중의 많은 관심을 끌었다. [IS 포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세상이 떠들썩하다. 서방 세계는 러시아에 강력한 경제 제재를 가하고 있다. 불똥은 스포츠로도 확산되었다. 국제축구연맹(FIFA)은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 러시아를 퇴출했다. 다른 종목도 동조하면서, 러시아는 스포츠계에서 ‘왕따’로 전락 중이다.
“스포츠와 정치는 분리돼야 한다”는 주장이 있지만, 실제로 이 둘은 언제나 얽혀 있었다. 예를 들어 FC 바르셀로나는 카탈루냐 독립운동의 상징적인 존재다. 우크라이나에도 2차 세계대전 당시 축구를 통해 자긍심을 올린 전설적인 이야기가 있다.
1922년 우크라이나는 소비에트 연방(소련)에 통합된다. 소련은 1928년 이 지역의 민족주의를 탄압하며 많은 지식인을 처형했다. 1930년대 들어 스탈린이 추진한 집단농장화 정책으로 인해, 우크라이나 농가는 식량을 모조리 뺏겼다. 그 결과 농업에 최적화된 토양을 가진 우크라이나가 1932~33년에 걸쳐 ‘홀로도모르’라는 대기근을 겪는다. 이 기간에 무려 300만 명이 사망했다.
1941년 6월 나치 독일은 소련과 맺은 불가침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독소전쟁을 일으킨다. 당시 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자들은 독일이 소련으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켜줄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다고 한다. 하지만 나치에게 우크라이나인을 포함한 슬라브인들은 ‘운테르멘셴(Untermenschen, 열등 인종)’에 불과했다. 나치는 독립을 꿈꿨던 민족주의자 및 수많은 우크라이나인들을 악명높은 수용소인 아우슈비츠 등으로 보냈다.
소련을 침공한 지 3개월 만에 히틀러의 군대는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키에프)를 점령했다. 나치는 풍요로운 삶에 대한 환상을 시민들에게 심기 위해 축구를 전략적으로 이용했다. 언론인 게오르기 슈베초프는 루흐(Rukh)를 창단하고, 우크라이나 최고의 팀 FC 디나모 키이우 출신 선수들을 클럽에 합류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이들은 거절했다. 루흐는 친 나치 단체였기 때문이다.
한편 디나모에서 뛰었던 골키퍼 니콜라이 트루세비치는 빵 공장에 취업한다. 옛 동료들도 그를 따라 합류했고, 이들을 중심으로 FC 스타트(Start)가 설립되었다. 이 클럽에 합류한 이들에게는 다른 노동자들보다 좀 더 많은 식량과 훈련 시간이 주어졌다. 이렇게 스타트와 루흐는 각각 애국자와 나치 동조자를 상징하게 된다.
첫 경기에서 스타트는 루흐를 7-2로 완파한다. 이후 이들은 헝가리 군인 팀, 독일 포병 팀, 철도 팀 등을 상대로 6차례 대결을 벌여 모두 승리했다. 단순히 이긴 게 아니었다. 스타트는 7경기 동안 37골을 득점했고, 8실점만 했다. 나치는 이들의 뛰어난 성적이 맘에 들지 않았다.
결국 아리안 민족의 우수함을 과시하기 위해 독일 축구 최고의 재능이 모인 군인팀 플라켈프(Flakelf)와 스타트의 경기가 성사되었다. 1942년 8월 6일 열린 두 팀의 대결은 스타트의 5-1 완승으로 끝났다.
나치는 이념적 라이벌이자 열등 인족에게 진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전력을 보강한 플라켈프는 스타트와 8월 9일 재경기를 벌인다. 경기 전 게슈타포 장교는 스타트 선수들에게 오른팔을 드는 나치식 경례를 강요했다. 하지만 이들은 응하지 않았다. 전반전에 스타트는 3-1로 리드했다.
하프타임에 나타난 나치 장교는 이들에게 “오늘은 독일만이 이길 수 있다”라는 오싹한 메시지를 전한다. 후반전에 플라켈프는 동점을 만들어내나, 결국 경기는 스타트의 5-3 승리로 끝났다. 우크라이나가 점령군 독일의 파시즘에 이긴 것이다.
스타트와 플라켈프의 재경기를 알리는 공식 포스터. 축구(fussball) 밑에 복수(revanche)라는 단어가 눈에 띈다. 경기에 패한 후 나치는 더 이상의 망신을 피하기 위해 스타트와 독일팀의 경기를 금지했다. [IS 포토]
경기 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한다. 승리에 고무된 관중들이 반 나치 구호를 외치며 열광했다는 얘기가 있는가 하면, 두려움에 떨었다는 상반된 설도 있다. 보복에 나선 나치가 선수들을 즉시 총살했다는 극단적인 설을 바탕으로, 이 경기는 훗날 ‘데스 매치(The Death Match)’로 불리게 된다.
특히 소련은 파시즘에 맞서 싸운 인민들의 영웅적인 행위라며 이를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전설이 만들어진 것이다. 선수들은 훈장을 받았다. 3200만 명의 소련인이 이 경기를 다룬 영화 ‘세 번째 시간’을 즐겼다고 전해진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되자 우크라이나의 역사가들은 데스 매치를 중립적 입장에서 조사했다. 독일 검찰도 관심을 보였다. 나치는 경기 후 9일이 지나 스타트 선수 9명을 체포했고, 이 중 5명이 나치 친위대 SS에 의해 살해된 것이 사실로 밝혀졌다. 하지만 이들의 처형은 나치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맞대결에서 벌어진 비극이지, 경기 패배에 대한 복수하고는 상관이 없다고 한다.
사실 스타트의 선수들은 처음부터 이 경기에 대해 언급하길 망설였다. 증언을 번복한 적도 있다. 두려움이 이유였다. “나치의 협력자로 보일까” “힘든 시대에 남들보다 덜 가혹하게 살았다는 비난을 받을까” “소련의 영웅주의 선전은 모순이다”라는 등의 두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소련이 주는 훈장을 거절한 한 선수는 훗날 “거짓말에 참여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존 포드 감독의 영화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는 “전설이 진실보다 낫다면 전설을 인쇄하라”는 유명한 메시지를 남겼다. 사람들은 때로는 진실을 외면하고 영웅이 나오는 동화를 선호한다.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여전히 불분명하지만, 데스 매치는 우크라이나인에게 애국심과 저항의 상징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