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서초사옥. 연합뉴스 '반도체 코리아'의 주역 삼성전자가 연초부터 위기론에 직면했다. 매출 신기록을 써도 시장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1위 자리를 공고히 한 메모리 반도체만으로는 오래 살아남을 수 없다는 우려 때문이다. 미래 먹거리인 시스템 반도체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는 미국에서 대만으로 주도권이 넘어가는 모습이다.
유례없는 주가 폭락에도 삼성전자는 신중함을 유지하고 있다. 다급하게 여론 달래기에 나서는 대신 숨을 고르고 있다. 단기 성과 창출에 연연하지 않고 '초격차 2.0'으로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기 위해 칼을 갈고 있다. 벌써 위기를 말하기에는 이르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매출 신기록에도 주가는 '뚝'
지난 9일 국내 증시에서 삼성전자는 6만7800원에 마감했다. 회사 주가가 6만7000원대로 떨어진 것은 1년 4개월 만이다. 며칠 전 잠정실적 발표에서 역대 최고 매출 달성을 예고했던 것이 무색하다.
삼성전자는 2022년 1분기 매출과 영업이익 각각 77조 원, 14조1000억 원을 기록할 것으로 내다봤다. 지난해 분기마다 최대 매출을 쓴 데 이어 또다시 새로운 역사에 한 발짝 다가가게 된 것이다.
하지만 회사의 주가는 하락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악재를 충분히 반영했다던 증권가도 일제히 목표 주가를 하향 조정했다.
김선우 메리츠증권 연구원은 "낸드의 출하량 급증 등 반사요인으로 메모리 이익 기여가 기대 이상이었지만, 아쉽게도 주가 재평가 요인으로 설명할만한 주요 영업지표(파운드리·하이엔드 스마트폰 출하 회복 등) 개선을 위해서는 아직 시간이 필요한 것으로 파악된다"고 말했다.
송명섭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목표 주가를 9만 원 중반대에서 8만 원 후반대로 낮추며 당분간 구간 매매를 할 것을 권고했다.
송 연구원은 "성장 사업 부문에서의 구조적 변화가 없다면 주가에 적용되는 밸류에이션(기업가치평가) 구간대가 상향 조정될 가능성은 작다"며 "최악의 경우 락바텀(최저점)은 6만 원 초중반대로 예상한다"고 했다.
국내 1등 기업을 향한 시장의 평가가 이례적으로 박하다. 이는 30%가 넘는 매출을 책임지는 반도체 사업 전망이 불투명해지면서부터다.
전 세계 파운드리·모바일 AP·D램 점유율. 트렌드포스·카운터포인트리서치 제공 여전히 삼성전자는 메모리 반도체에서 글로벌 우위를 굳게 지키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옴디아에 따르면 2021년 4분기 삼성전자의 반도체 매출은 199억9500만 달러(약 24조5540억 원)로 인텔을 제치고 1위에 올랐다.
데이터센터와 IT 기기 등에서 수요가 많은 D램과 낸드 시장에서 각각 42.3%, 33.1%의 점유율로 2위 기업을 10%포인트 이상 따돌렸다.
삼성 반도체는 역사가 꽤 깊다. 삼성그룹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이 1983년에 반도체 사업 진출을 선언했을 때만 해도 업계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초격차 신화를 쓴 권오현 전 삼성전자 회장(현 상임고문)이 경영진의 지원을 업고 세계 최초로 64MB D램을 개발, 선두 대열에 합류했다.
권오현 고문은 자신의 저서에서 "공기(공사하는 기간)를 절반으로 줄이고, 수율(생산품 중 합격품 비율)을 상상하기조차 힘든 목표로 설정했다"며 "직원들은 '개선'이라는 보수적인 영역에서 벗어나 '혁신'의 영역으로 생각의 틀을 바꿔 나갔다"고 회상했다.
그런데 차세대 반도체 시장에서는 삼성전자의 위용을 찾아보기 힘들다.
최대 고객인 삼성전자 모바일의 두뇌인 AP(중앙처리장치)에 품질 논란이 제기된 것이다. 과부하에 대응하는 성능 강제 저하 프로그램의 존재까지 부각되면서 기업 신뢰도는 바닥을 쳤다.
삼성전자의 최신 모바일 AP '엑시노스2200'. 삼성전자 제공 설계부터 생산까지 한 회사가 하는 메모리 반도체와 달리, 모바일 AP(중앙처리장치) 등 차세대 반도체는 각자 역할이 나뉜다. 반도체 설계만 하는 팹리스와 이를 대량으로 찍어내는 파운드리가 대표적이다.
팹리스에 기본 설계도를 제공하며 로열티는 받는 곳도 있는데 사실상 영국 ARM이 독점하고 있다.
햄버거 프렌차이즈를 예로 들면, ARM은 패티에 들어가는 최적의 소고기·돼지고기 비율을 정한다. 팹리스는 재료를 받아 맛을 극대화하는 레시피를 만든다. 파운드리가 최종적으로 정성껏 음식을 만들어 소비자의 식탁에 올린다.
삼성전자는 팹리스와 파운드리 모두 손을 뻗었다. 스마트폰 갤럭시 시리즈에 들어가는 AP '엑시노스'를 설계하고 이를 직접 양산하기까지 한다.
삼성전자 화성사업장. 삼성전자 제공
추격하는 삼성…"시행착오 당연"
전 세계 1위 스마트폰 브랜드에 힘입어 메모리만큼이나 시스템 반도체도 금방 덩치를 키울 것처럼 보였지만 신흥 강자 대만(TSMC·미디어텍)의 입지가 남다르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가 발표한 작년 4분기 파운드리 점유율에서 삼성전자(18.3%)가 2위에 올랐지만 TSMC의 점유율은 52.1%로 압도적인 기세를 자랑했다.
같은 기간 또 다른 시장조사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의 조사에서도 모바일 AP 점유율 1위를 미디어텍(33%)이 가져갔다. 삼성전자 엑시노스는 한 자릿수(4%)에 그쳤다.
11일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대만은 전 세계에서 파운드리 사업을 처음으로 시작한 선도 국가다. 앞서 있을 수밖에 없다. 미디어텍은 중국 스마트폰 시장 덕분에 성장했다"며 "예전보다 개발이 어려워졌지만, 시장이 요구하는 미세공정이 결국 가야 할 길"이라고 말했다.
미세공정은 칩을 나노미터 단위로 얇고 작게 만드는 기술이다. 제품의 소형화와 성능 개선으로 이어진다.
삼성전자의 최신 스마트폰 '갤럭시S22'(이하 갤S22)에 업계 첫 4나노 AP가 탑재됐는데, 발열과 수율 이슈로 홍역을 치렀다. 갤S22의 출하량은 증권가 예상치인 약 1000만대에도 크게 못 미치는 700만~800만대로 추정된다.
다만 1위 사업자를 추격하는 입장에서 시행착오는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박재근 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장은 "삼성이 4나노 공정을 미리 썼다. TSMC를 능가하는 기술로 새로운 고객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이라며 "어려운 기술에 먼저 도전했으니 수율이 안 나오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박 학회장은 또 "몇 달 안에 지금의 상황이 해결될 것이다. 공정의 문제를 확인하는 데 아무리 빨라도 한 달 이상이 걸린다"고 했다.
무리하게 신규 공정을 도입한 삼성 스마트폰 사업부의 결단도 아쉽다고 했다. 소프트웨어 기술력 차이를 하드웨어로 좁히려 한다는 이유에서다.
삼성전자는 파고 속에서도 제2의 도약을 준비한다. 올 상반기 안에 3나노, 2025년까지 2나노 양산에 돌입한다. 미세공정의 한계를 극복하는 패키징(수직 적층) 경쟁력도 가져간다.
2030년까지 171조 원을 쏟아 첨단 공정 연구·개발과 생산라인 건설에 박차를 가하는 '시스템 반도체 2030' 비전도 차근차근 이행 중이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인공지능(AI)·메타버스(3차원 가상세계)·자율주행 등 미래 기술의 근간을 반도체라고 보고, 기술의 초격차와 과감한 투자로 중장기 지속 성장의 발판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