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후(24·키움 히어로즈)의 올 시즌 도루 시도는 두 번뿐(17일 기준)이다. 발이 빠르지 않은 노시환(한화 이글스·4회)보다 도루 시도가 적다. 그렇다고 출루율(0.393)이 낮은 것도 아니다. KBO리그 톱10에 이름을 올리지만 좀처럼 뛰지 않는다.
이정후는 2017년 데뷔해 지난 시즌까지 연평균 도루 시도가 15.6회였다. 2019년 20회(성공 13개)로 정점을 찍은 뒤 2020년 14회(성공 12개), 지난해에는 13회(성공 10개)를 기록했다. 주루 센스와 빠른 발을 갖췄지만, 많이 뛰는 유형은 아니었다. 그런데 올해는 그 기조가 더 굳어졌다. 현재 페이스라면 개인 최저 수준(7~8회 시도)에서 시즌을 마친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정후는 박병호(현 KT 위즈)와 함께 중심 타선에 포진하면서 도루를 멀리했다. 2020년 6월 인터뷰에서 그는 "3번 타순에 들어가면서 (4번 타자인) 박병호 선배 앞이라 자제하고 있다. 대한민국 최고의 타자가 타석에 있는데 도루하다가 아웃되면 팀의 손해"라며 "주자가 1루에 있을 때 타자의 집중력과 (도루하다 실패해) 갑자기 사라졌을 때의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박병호는 지난해 12월 KT로 FA 이적했다. 타선에 변화가 생기면서 이정후의 도루 시도가 늘어날지 관심이 쏠렸는데 오히려 더 줄었다. 홍원기 키움 감독은 "이정후에게 (개인 판단으로 도루를 시도할 수 있는) 그린라이트를 따로 주지 않는다. 우리 팀에선 김혜성만 그린라이트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도루할 만한 확실한 투수가 나오면 (도루) 시그널을 보낸다. 도루도 해보던 선수가 해야 안 다친다. 갑자기 하면 부상 위험이 있다"고 강조했다. 구단은 이정후가 타격에만 집중해도 충분히 제 몫을 한다고 판단한다.
이정후와 도루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아버지인 '바람의 아들' 이종범은 한 시대를 풍미한 도루왕 출신이다. 통산 도루가 510개로 KBO리그 역대 3명뿐인 '500도루 클럽' 가입자 중 하나다. 도루왕 타이틀을 통산 네 번이나 차지했고, 1994년 달성한 84도루는 아직도 깨지지 않는 단일시즌 최고기록이다. 이종범은 2012년 은퇴식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기록으로 '84도루'를 꼽으며 "아들이 야구를 하고 있는데 내 기록을 깨줬으면 한다"고 말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당시 이정후는 휘문중에서 야구선수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이정후는 자타공인 KBO리그 최고의 타자가 됐다. 지난해 데뷔 첫 타격왕(0.360)에 올랐고, 4년 연속 외야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받았다. 지난 4월에는 KBO리그 최연소(23세 7개월 28일)이자 최소 경기(670경기) 900안타를 달성했다. '국민타자' 이승엽의 최연소(24세 9개월 13일) 기록과 이종범의 최소 경기(698경기) 기록을 함께 갈아 치웠다.
리그 역사를 새롭게 쓰고 있지만 유독 도루는 거리가 멀다. 이정후는 "도루를 못 해서 안 하는 건 아니다. 경기 흐름에 따라 도루해야 할 상황이 오면 시도하겠지만, 아직 그런 상황이 없었다"고 자신감을 내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