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실수가 반복되지 않도록 징계 규정을 새롭게 마련하고, 운영 시스템을 개선해 나가도록 하겠다"
지난해 1월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선수협)가 밝힌 공식 입장이다.
당시 KBO리그에선 미등록 대리인(에이전트) 문제가 화두였다. 일간스포츠 취재 결과, 리코스포츠에이전시(리코)가 미등록 대리인 자격으로 투수 우규민(삼성 라이온즈)의 FA(자유계약선수) 계약에 관여한 사실이 알려져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선수협 중재위원회에 참석한 한 변호사는 "규정 위반이 명백하다"고 했다. 그러나 한 달여가량 진상을 파악한 선수협이 리코에 한 건 주의 조치뿐이었다. 관련 처벌 규정이 없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선수협은 "징계 규정을 새롭게 마련하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관련 규정이 여전히 그대로다. 선수협에 따르면 'KBO리그 선수대리인 규정'을 개정하려면 변호사 포함 6~7명으로 구성된 선수협 운영위원회를 거쳐야 하는데 논의가 지지부진하다. 복수의 주전급 선수를 보유한 한 공인대리인은 "큰 문제다. 후진국도 아니고 규정이 없다고 슬쩍 넘어가는 게 말이 되는가. (아직도 규정이 없다는 건) 정말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KBO리그 선수대리인 규정'은 편법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 현행 KBO리그에선 대리인 1명(법인 포함)이 보유할 수 있는 인원을 최대 15명(구단당 3명)으로 제한한다. 특정 대리인이 너무 많은 선수를 보유할 경우 발생하는 문제점을 차단하기 위한 이른바 '독과점 방지법'이다. 자칫 몇몇 선수의 계약을 가지고 FA 시장 분위기를 쥐락펴락할 수 있다.
하지만 대형 에이전시가 개인 대리인을 이용, 우회적으로 선수 보유 제한을 피해도 선수협이 이를 엄단할 명확한 규정이 없다. 인원 제한을 받지 않는 매니지먼트 계약과 대리인 계약을 혼용해 사용하더라도 마찬가지다. 현장에서 벌어지는 편법과 현행 처벌 규정의 간극이 크다. 한 선수협 관계자는 "처음 (규정을) 만들 때 포괄적으로 만들다 보니까 (각종 문제에 대한 처벌과 관련해) 디테일한 부분이 빠져 있는 게 사실"이라고 했다.
"제도가 너무 폐쇄적"이라는 자성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현재 선수협은 어떤 선수가 어떤 대리인과 계약 관계인지 확인해주지 않는다. 기간이나 수수료율을 비롯한 계약 상세 내용뿐 아니라 기본적인 계약 여부조차 함구한다. 근거는 '선수협회는 선수대리인이 보고한 선수 관련 정보 등을 선수협회 임직원 이외 제3자에게 공개할 수 없다'고 명시된 KBO리그 선수대리인 규정 제23조 [선수협회의 기밀준수] 조항이다. 특정 에이전시는 자사 홈페이지에 관리하는 선수 목록을 띄어놓으며 홍보하지만, 선수협은 이와 관련해 한마디도 하지 못한다. 공인대리인 제도를 운용하는 주체가 아닌 선수협인데 대리인에 끌려간다는 인상까지 심어준다.
미국 메이저리그(MLB)는 통계 전문 사이트인 베이스볼 레퍼런스에는 대리인(Agents) 항목이 따로 분리돼 있다. 누구나 원하는 시간에 선수의 대리인을 확인할 수 있다. 한 공인대리인은 "투명성을 갖고 운영하려면 현재 시점에서 어떤 대리인이 어느 선수와 계약돼 있는지 선수협 홈페이지 등을 통해 알리는 게 맞다고 본다"며 "대리인 계약이 돼 있는지 선수에게 직접 물어보기 모호한 경우도 있다. (자칫 공개하면) 서로를 음해하고 공격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지만, 명확하게 가려면 공개가 맞다"고 강조했다. 대리인마다 어떤 선수와 계약돼 있는지 궁금한 건 선수들도 마찬가지다. 매니지먼트 계약이지만 선수가 대리인 계약으로 착각하는 사례도 있다.
KBO(한국야구위원회) 관계자는 "구단은 KBO가 공문을 보내주면 알게 되는데 그걸 하나하나 챙기지 못할 수 있다. 홈페이지 같은 곳에 열람하면 좋은데 왜 그렇게 안 하는지 모르겠다. 논의해봐야 되겠다. (계약 여부를) 물어보면 당연히 알려줬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란 거에 놀랐다"고 말했다. 선수협 관계자도 "KBO와 함께 (관련) 논의할 의사가 있다"고 했다.
올 시즌 뒤 FA 시장에는 2년 치 매물이 한꺼번에 쏟아진다. 현행 9년, 대졸 8년인 FA 취득 기간이 고졸 8년, 대졸 7년으로 각각 1년씩 단축되는 첫 시즌이다. 기존 규정대로 FA가 되는 선수에 추가로 1년 단축 혜택을 받는 선수들까지 시장에 함께 풀리게 된다. 현재의 분위기와 규정이라면 큰 혼란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