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축구의 과거와 미래①] 황선홍 감독이 한일전 통해 얻은 고민 "한국 축구 색깔은 무엇인가"
등록2022.10.05 11:35
황선홍(54) 올림픽 축구대표팀 감독은 선수 시절 ‘일본 킬러’였다. 그런 그가 감독으로서 한일전 참패의 쓰디쓴 경험을 했다.
과거 일본을 상대할 때 배수의 진을 치고 덤벼들었던 한국 축구는 최근 각급 대표팀이 4연속 ‘0-3 패배’를 당하는 굴욕을 경험했다. 이 중에는 황선홍 감독이 이끄는 23세 이하(U-23) 축구대표팀이 6월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 8강전에서 기록했던 0-3 패배도 있다.
선수와 지도자로 치열한 한일전을 모두 경험해본 황선홍 감독에게 한일전에 관해 물었다. 과연 한국 축구대표팀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에게 한일전은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U-23 대표팀 감독으로서 아시아 최강팀을 만들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이야기를 나눠봤다.
경기도 분당의 한 카페에서 만난 황선홍 감독은 “선수 때 한일전은 월드컵 경기만큼 비중이 컸다. 지면 안 된다는 생각만 있었다. 일본에 패하면 선수에 대한 비난, 언론 질타 같은 후폭풍이 매우 컸다. 한일전만큼은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질 수 있게끔 분위기가 조성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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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홍 감독은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당시 8강에서 한국은 일본과 맞붙었다. 이 경기에서 멀티 골을 넣은 황선홍 감독은 “일본이 한국의 상대로 정해지자 다들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 집중하기 시작했다. 라커룸에서 본 선수들의 눈빛부터 달랐다. 누가 이야기하지 않아도 선수들 스스로 일본과 경기에서는 그렇게 돌변했다”며 돌아봤다.
요즘 한국 축구에 투지력과 정신력이 없다는 비판이 나온다. 그러나 젊은 선수들을 지도하는 황선홍 감독은 정신력만 강조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황선홍 감독은 “경기장에서 평정심을 유지해 냉정한 플레이를 하는 게 정신력이지 않나. 선수들한테 정신력으로 이기자고 강요해선 안 된다. 어떻게 하면 축구로 이길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요즘 젊은 친구들은 한일전을 수많은 경기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시대의 흐름이지 않나. ‘너희들이 태극기를 달고 뛰면 무조건 일본은 이겨야 해’라는 논리보다 ‘어떤 방법을 꺼내 일본을 제압할 것인가’를 제시해야 한다. 강요만 해서는 설득이 안 된다. 지도자로서 선수들에게 동기부여하는 부분에 대한 고민이 참 많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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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축구의 ‘색깔’ 고민해야
황선홍 감독은 선수 시절 아시아 최고의 타깃형 스트라이커였다. 이런 그는 “한국 축구의 색깔이 무엇일까, 장점은 무엇일까에 대한 생각이 많이 든다. 개인적인 생각으론 한국 축구의 장점은 속도라고 본다. 빠른 스피드를 이용해 직선적이었다. 공·수 전환이 재빨랐고, 아주 저돌적이었다. 지금은 이런 장점이 없어진 이유가 무엇인지를 찾아 기존의 장점을 발전시킬 방법을 고민해야 하는 시기”라고 강조했다.
발전된 축구 전술 등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괴리감이 나타났다. 최근 세계 축구의 트렌드는 빌드업(패스 위주의 공격전개), 게겐프레싱(강한 전방압박) 등이 주를 이루고 있다. 한국 축구대표팀의 파울루 벤투 감독이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세계 축구 트렌드에 부합하는 축구를 접목해나가고 있다. 하지만 개인 기술이 부족한 한국 선수들에게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황선홍 감독은 “세계 축구의 트렌드는 계속 변한다. 그러한 축구가 나쁘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다만 한국 선수에게 맞는 축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빌드업과 더불어 우리 선수와 축구에 맞는 지향점을 설정할 필요가 있다. 유소년 및 학생 축구의 잣대는 프로와 대표팀이지 않나. 대표팀-프로-유소년이 함께 가는 방식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어 “현재 한국 축구는 과도기다. 더 좋은 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혼선이 나타났다. 후방 빌드업 등 좋은 기술이 접목되지 않으면 더 나은 축구를 할 수 없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상대 선수와 투쟁, 몸싸움 등을 강조해야 한다. 기술 축구를 하기 위해 거친 플레이를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이유로 (한국 축구가) 어려움을 겪는 단계가 아닌가 싶다”고 덧붙였다.
일본은 자국 축구의 약점을 지도자 교육을 통해 보완하기 시작했다. 지도자 교육 강좌에서 일본 선수가 몸싸움에 져 나뒹구는 모습을 담은 영상을 아무 말도 없이 15분 동안 보여주기도 했다. 몸싸움을 이겨내지 못하면 축구 강국과 대결해 이길 수 없다는 경각심을 강조한 것이었다. 이런 노력 덕분에 현재 J리그와 일본 대표팀 모두 저돌적이고 빠른 템포의 경기가 가능해졌다.
반면 한국 축구는 소극적으로 변했다는 게 황선홍 감독의 진단이다. 그는 “우리의 강점이 없어졌다. 약간 정적인 축구가 돼버렸다. 한국은 파워풀한 축구가 사라지고 얌전하게 패스만 하는 축구를 하고 있다. 일본과 반대가 됐다. 예전에 우리가 장점으로 삼았던 속도, 공간 침투와 움직임을 일본이 보여주고 있다. ‘축구 류(스타일)’가 바뀌었다”고 짚었다.
한국 축구만의 강점을 발휘할 수 있는 색깔을 찾아야 한다는 게 축구계의 지적이다. 한국 축구의 방향성을 정립하기 위해 황선홍 감독은 ▶인적 자원 투자 ▶지도자 교육 ▶유소년-프로-대표팀의 축구 스타일 정리 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황 감독은 “어떠한 축구를 시도하겠다는 정책의 일관성이 없다. 대한축구협회, 프로축구연맹 등이 머리를 맞대고 방향성을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
황선홍 감독은 “한국과 일본의 전반적인 시스템, 저변, 투자 규모 등에 차이가 있다. 이에 따라 시간이 지날수록 한국과 일본의 격차가 벌어지는 건 사실이다. 일본의 움직임을 봤을 때 (한국이) 미래지향적인 방법을 실행하지 않으면 더 어려워질 수 있다는 건 분명하다”면서도 “난 늦지 않았다고 본다. 한국 축구는 경쟁력이 있다”고 했다.
그는 이어 “대한축구협회에서도 많이 고민하고 변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만의 축구 문화 등을 정리해 나간다면 일본과 격차를 줄일 수 있다고 본다. 우리의 실정에 맞는 좋은 시스템을 고민해야 한다. 축구가 국민에게 주는 희열과 감동을 우리는 직접 눈으로 확인했지 않은가. 한국 축구 발전을 위해 마음을 한데 모으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