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경(34·흥국생명)은 우승 청부사로 통한다. 프로 무대 데뷔 시즌(2005~06)부터 소속팀 흥국생명의 V리그 통합 우승을 이끌었고, 일본 리그에 진출한 2009~10시즌은 약체였던 JT 마블러스를 정규리그 1위로 올려놓았다. 2011년 6월엔 튀르키예 리그 명문 구단 페네르바흐체와 계약, 이후 6시즌 동안 정규리그·챔피언결정전·CEV(유럽배구연맹) 챔피언스리그 등 우승 트로피 7개를 들어 올렸다.
코로나 팬데믹 탓에 국내 리그에 복귀했던 2020년엔 그의 새 소속팀 흥국생명을 향해 '어·우·흥(어차피 우승은 흥국생명)'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다. 김연경이 합류하는 팀은 당연히 정상에 오를 것이라는 전망이 깔린 표현이었다.
'배구 여제'로 불리는 김연경도 이런 기대치가 버거울 때가 있었다. 그는 2020년 KOVO컵 결승전에서 GS칼텍스에 패한 뒤 개인 SNS(소셜미디어) 채널을 통해 '당연히 이겨야 한다'는 외부 시선이 자신과 동료들에게 부담감으로 작용했다고 돌아봤다. 경기를 즐기는 GS칼텍스 선수들의 모습에 감명을 받았다는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다.
김연경은 지난 6월, 흥국생명과 계약하며 두 번째로 V리그에 컴백했다. 지난 시즌 정규리그 6위에 그쳤던 흥국생명은 단번에 3강 후보로 부상했다. 19일 열린 미디어데이에선 상대 사령탑 3명이 흥국생명을 우승 후보로 꼽았다.
김연경은 V리그 복귀전부터 진가를 보여줬다. 지난 26일 인천 삼산월드체육관에서 열린 페퍼저축은행과의 홈 개막전에서 18득점·공격 성공률 71.43%를 기록하며 흥국생명의 세트 스코어 3-0 완승을 이끌었다. 경기 승부처였던 2세트 중반 전·후위를 가리지 않고 뛰어올라 상대 코트를 폭격했다. 김형실 페퍼저축은행 감독은 "김연경 때문에 힘이 쭉쭉 빠진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김연경은 2년 전보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코트에 서고 있는 것 같다. '반드시 우승해야 한다'는 부담감 대신, 매 경기 나아지는 팀을 지켜보는 설렘이 더 크다.
페퍼저축은행전 종료 뒤 만난 김연경은 "(팀 성적에) 기대치가 높아졌지만, 부담은 전혀 없다. 만약 흥국생명이 지난 시즌 우승 팀이라면,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압박이 있겠지만, 6위였기 때문에 더 올라갈 일만 남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김연경은 이어 "'흥국생명이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라는 궁금증이 생긴다. 나에게도 올 시즌은 도전이다. 재밌을 것 같다. 끝까지, 열심히 해보고 싶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연경은 페퍼저축은행전 경기력에 만족하지 않았다. 서브 리시브가 흔들린 탓에 권순찬 감독이 강조하는 '스피드 배구'를 연습 때만큼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터 김다솔과의 호흡에 대해서도 "아직 100% 수준으로 보긴 어렵다. 몇 번에 그쳤던 좋은 장면도 더 나와줘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김연경은 "한 경기, 한 경기를 치를수록 팀워크와 전력이 나아질 것이라고 자신한다. 세터들이 더 좋은 세트를 할 수 있도록, 다른 선수들이 (리시브를) 잘 받아줘야 할 것 같다. 각자 제 역할을 하면 더 좋은 공격이 이뤄질 것"이라는 기대를 드러내기도 했다.
흥국생명은 학폭(학교폭력)으로 논란을 일으킨 이재영·다영 쌍둥이 자매가 퇴출당한 뒤 전력이 크게 떨어졌다. 그러나 4년 차 아포짓 스파이커 김다은이 급성장하며 측면 공격력이 강해졌고, 베테랑 미들 블로커 김나희의 경기력이 좋아지며 약점이었던 높이 싸움도 경쟁력을 갖췄다. 주전이었던 김미연이 벤치를 지킬만큼 뎁스(선수층)도 두꺼워졌다. 김연경은 전력은 2년 전보다 약하지만, 함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지금의 흥국생명에 더 큰 기대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