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스포츠가 2023년 신년 시리즈로 '타격은 어쩔티비(feat.김태균)'를 연재합니다. 한국 야구 역사상 최고의 타자 중 하나로 꼽히는 김태균 해설위원이 연구한 야구, 특히 타격에 대한 이론·시각을 공유합니다. 이 시리즈를 통해 타격의 재미, 나아가 야구의 깊이를 독자들이 함께하길 기대합니다. 〈편집자 주〉
타격이 절정에 올랐을 때, 역설적이게도 난 스윙을 별로 하지 않았다. 한 타석에서 거의 스윙 한 번으로 끝냈다. 그러면 결과가 나왔다. 안타든 아웃이든.
타석에서 한 번도 스윙하지 않은 적도 꽤 있었다. 볼넷을 얻을 때도 있었지만, 선 채로 삼진을 당하는 때도 적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이를 미노가시(見逃し) 삼진이라고 부른다.
일본인들은 “인생이라는 타석에 섰다면 미노가시 삼진은 당하지 말라”는 고바야시의 명언을 사랑한다. 그래서인지 스윙하지 않고 아웃되는 걸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일본 야구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인지 한국도 비슷한 인식을 가진 이들이 많다. 나도 어렸을 때 “타석에서 가만히 서 있다 들어오지 마라” “그럴 거면 왜 방망이를 들고 있느냐”는 꾸중을 많이 들었다. 감독‧코치님들은 서서 삼진 당하는 모습이 참 보기 싫은 모양이다.
잘 생각해야 한다. 인생은 한 번뿐이지만, 타석은 하루에도 네 번은 돌아온다. 거기서 안타 하나만 치고, 볼넷 하나만 골라도 성공이다.
단 한 번의 기회를 기다려라
테드 윌리엄스는 『타격의 과학』에서 이를 실증적으로 설명했다. 지름 7.3㎝의 야구공이 하나의 셀(cell)이라면 스트라이크존은 (타자의 키에 따라 다르지만) 77개로 나눌 수 있다. 타자의 ‘베스트 셀’ 안에 들어온 공만 치면 4할 타율이 가능하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또 스트라이크라고 해도 외곽의 나쁜 셀로 날아오는 공을 치면 타율은 2할3푼으로 떨어진다고 윌리엄스는 역설했다. 같은 타자라고 해도 어떤 공을 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다르다는 거다.
‘오마하의 현인’이라 불리는 전설적인 투자자 워렌 버핏은 윌리엄스의 타격 이론으로부터 힌트를 얻어 투자 원칙을 세웠다고 한다. 모든 공을 다 때릴 필요가 없다. 마찬가지로 돈이 있다고 당장 주식을 살 필요가 없다. 좋은 공(기회)을 기다리는 것도 훌륭한 전략이라는 걸 윌리엄스와 버핏이 웅변하고 있다.
나도 그저 내 스트라이크존에 충실했다. 내 존을 확실하게 설정했다. 그걸 벗어나는 공은 쳐봐야 좋은 타구가 나오기 어렵다는 걸 알기 때문에 지켜본 거다.
방망이가 나쁜 공을 따라 나가면 타자의 밸런스가 깨진다. 선수의 몸은 마지막으로 했던 동작을 기억한다. 그리고 다음 타석에 악영향을 끼친다. 내가 나쁜 공이라고 판단한 공이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는다고 해도 받아들였다. 그리고 다음 공을 기다렸다. 타석 당 한 번의 스윙으로 거의 끝낸 건 그래서 가능했다.
말은 쉬울지 모르지만, ‘원샷 원킬’은 실행하기 어렵다. 내가 노리는 공이 1~2구 안에 들어온다면 과감하게 스윙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참고 기다려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기술도 기술이지만, 인내심이 필요하다.
타자에게는 눈에 보이는 공을 때리려는 본능이 있다. 초구를 그냥 보내면, 다음에 이보다 더 좋은 공이 온다는 보장도 없다. 타자는 이 심리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 다음 기회도 있을 수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영리한 투수는 타자의 조급함을 이용한다.
‘원샷 원킬’ 스윙은 투수를 괴롭히는 데 효과적이다. 경기 초반 4번 타자가 상대 선발 투수의 초구를 받아쳐 솔로 홈런을 쳤다고 가장하자. 이 공격은 상대에게 얼마나 충격을 줄까?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상대 투수가 에이스라면 1실점 정도는 툭 털어낼 거다.
4번 타자가 아무리 뛰어나봐야 9개 타순 중 하나를 차지할 뿐이다. 혼자서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다. 동료와 함께해야 성과를 낼 수 있다. 타선(打線)은 연결을 의미한다.
타선의 목표는 경기 초반 1득점일 수 있다. 상황에 따라 좋은 투수를 조금이라도 빨리 끌어내리는 게 더욱 중요할 때도 있다.
1번부터 9번까지 모든 타자가 투수와 10구까지 가는 승부를 벌인다는 극단적인 가정을 해보자. 에이스는 안타나 볼넷을 허용하지 않고 타선을 퍼펙트로 막아도 3이닝을 마칠 때 투구 수가 90개에 이른다. 그러면 타선이 이긴 거다.
투수가 한 타자에게 공 10개를 던지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그래도 타자들의 지향점이 같다면 그 목표에 가까이 갈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선발 투수와의 싸움을 이겨내면 경기 후반은 훨씬 수월해진다. 선발 투수가 내려간 뒤 등판하는 투수들을 상대로 타자들은 더 좋은 결과를 낼 수도 있다.
다시 말하지만, ‘원샷 원킬’은 좋은 공을 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쳐봐야 안타가 될 확률이 떨어지는 공을 건드려서 투수 좋은 일을 시키지 말자는 전략이다. 까다로운 공을 때려봐야 범타가 될 가능성이 크다. 무사 또는 1사에서 주자가 1루에 있다면 병살타가 될 수 있다.
스탠딩 삼진이 부끄러운 게 아니다
나는 선 채로 삼진 당하는 걸 싫어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고맙게도 김인식 감독님 같은 분은 “삼진 당해도 괜찮으니까 나쁜 공은 절대 건드리지 마”라고 말씀해주셨다. 내게 큰 힘이 되는 지지였다.
찰리 로의 책 제목처럼 타격은 ‘3할의 예술’이다. 타자는 기본적으로 언더독(underdog·상대적 약자)이다. 투수가 잘 던져서 타자가 졌다면, 그 결과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여기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겠지만, 나에게는 최선의 전략이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타자는 자신만의 스트라이크 존을 설정해야 한다. 그 다음 좋은 스윙을 만들어야 한다. 말이 쉽지, 실행하기는 정말 어렵다. 좋은 스윙이 무엇인지,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는 ‘네버 엔딩 스토리’다.
돌아보면 천안북중학교 3학년 시절이 내게 아주 중요했다. 중학생 선수에게는 경기를 뛸 기회가 많지 않다. 훈련만 엄청나게 했다. 똑같은 걸 반복하기 지겨워서 여러 타격을 실험했다. 스트라이드 없이 힙턴(hip turn)을 중심으로 스윙을 해봤고, 왼다리를 무릎 높이까지 올렸다가 내디디는 레그킥도 해봤다. 왼 어깨를 홈플레이트 방향으로 밀어 넣어 ‘벽’을 만들어 보기도 했다.
시키는 것만 하지 않고 스스로 다양한 시도를 해봤다. 좋은 결과는 고등학교 진학 후에 내면 되니까 중학생 시절에는 기초를 다지는 데 전념한 거다. 이 과정을 통해 내 장점과 단점을 더 정확히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