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에게 연기의 스펙트럼이란 한계가 없는 도전이지만 가보지 않은 길, 해보지 않은 역할이라면 쉽지만은 않을 터다. 데뷔 19년차의 배우 엄태리도 마찬가지다.
엄태리는 오는 3월 5일부터 4월 2일까지 서울 강남구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막을 올리는 창작 뮤지컬 ‘루쓰’의 무대에 오른다. 이 뮤지컬은 구약성서 중 룻기를 원작으로, 아주 한참 전의 이야기를 현대의 눈높이로 각색해 즐겁고 감동적으로 그린다.
엄태리는 김현숙과 함께 이 작품에 더블 캐스팅됐다. 극 중 남편과 아들을 잃고 며느리와 힘들게 살아가는 나오미 역을 맡고 있다. 과거에는 과부로 사는 게 눈총을 받았다. 당하는 당사자 입장에서는 고통 그 자체였을 터다. 그런 나오미는 며느리 루쓰의 행복을 위해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푸는 아이콘으로 등장한다.
“한국 드라마에서 보이는 클리셰적인 캐릭터가 아니에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갈등을 다루는 고질적 스토리 같은 거요. ‘루쓰’에서는 나오미가 며느리 루쓰의 자립을 위해 헌신하죠. 사랑에 숙맥인 루쓰가 좋아하는 남자에게 어필할 방법을 은유적으로 알려줘요. ‘얘야, 이스라엘엔 이런 법이 있단다. 시스루 옷을 입고 향수를 뿌려라’. 이런 노래로요.”
엄태리는 데뷔 이래 처음으로 시어머니 역할을 소화한다. 고작 마흔 초반의 나이에,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고 아이도 없는 엄태리에게 연기와 별개의 또 다른 도전인 셈이다. 더욱이 극 중 며느리 루쓰가 재혼하는 상대 보아스는 나오미와 동년배의 남성이다. 성경을 연구한 학자들에 따르면 당시 이스라엘 여성은 13~14세에 결혼해 40대 초반이면 다들 할머니가 됐다. 그때까지 결혼을 하지 않은 남성 즉 보아스는 비슷한 나이의 여성과 결혼을 해야 했다. 그러나 나오미는 권리를 며느리에게 넘기고 사랑을 맺어준다.
“나오미는 재앙의 상징이었어요. 남편이 죽고 아들 둘도 세상을 뜹니다. 집안의 기둥인 남자 셋이 다 죽었으니 가진 것을 다 잃은 것이나 다름없죠. 절망적인 상태에서 고향으로 돌아와요.”
그러나 엄태리는 나오미를 마냥 슬프고 비참하게만 그리지 않을 생각이다. 매일 매시간 캐릭터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면서 신세대가 공감하는 긍정적인 모습을 무대에서 표현할 예정이다. 앞서 지난해 5월 트라이아웃(시험 공연) 참여로 캐릭터의 윤곽은 이미 그려놓은 상태다. 엄태리는 “(나오미가) 누구보다 화려하고 매력적이게 보여주려고 한다”면서 “젊은 남자가 매력을 느끼는 중년여성으로 보이는, 완숙한 여자의 느낌을 주려 한다. 이게 한국 정서에 안 맞을 수 있는데 미드에서 볼 수 있는 캐릭터”라고 설명했다.
2005년 뮤지컬 ‘그리스’로 데뷔한 엄태리가 어른의 역할을 맡기는 두 번째다. 뮤지컬 ‘문준경’에서 모진 고문으로 몸이 불편한 연기를 해 본 것 외에 실제 나이보다 높은 연배의 역할을 경험한 적이 없다. 그래서 엄태리는 트라이아웃에 이어 이번에도 여러 실험을 해보고 있다.
“머리에 흰 칠을 해서 노인처럼 분장도 해봤어요. 그런데 작품의 전체 상황이나 새로운 넘버를 해보니 완전히 새로운 역할이더라고요. 완전히 새롭게 창작된 캐릭터가 나올 겁니다. 그게 우리 작품의 킬포(킬링 포인트, 핵심)가 될 거예요.”
나오미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아들의 죽음으로 남남이 된 루쓰에게 내리사랑을 보인다. 어떻게 이런 모습에 공감할 수 있었을까. 엄태리는 “트라이아웃 때 3번 공연을 했는데 관객들로부터 그동안 받아보지 못한 사랑을 받은 느낌이었다”며 “작품과 내 연기에 박수와 응원을 보내줬다. 당시 받은 사랑과도 같은 마음이 나오미에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엄태리는 연습 현장에서 ‘태리천사’, ‘마라탕’이라는 색다른 별명을 불린다. ‘태리천사’는 동료들에게 ‘밥 먹었느냐’고 묻고 주변을 잘 챙겨 루쓰를 보살피는 나오미와 비슷하다고 해서 붙었다. 동료들은 그에게 ‘천사가 별거냐. 다 받아주면 천사다’며 엄지손가락을 높이 든다. 또 ‘마라탕’은 히브리어로 기쁨을 뜻하는 나오미에서 이어지는 별명인데, 넘버 중 한 소절에서 ‘나오미라고 부르지 마, 나는 마라야’에서 나왔다. 고통을 의미하는 ‘마라’를 자주 부르니 주변에서 마라탕이라고 부른단다.
“사실 내 인생도 마라예요. 모든 걸 잃은 나오미처럼 어릴 때 아빠의 사업이 부도가 나서 집에 빨간 딱지가 붙는 걸 목격했죠.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적도 있고요. 어려움을 겪는 역할을 하면서 하느님이 내 인생을 대본으로 쓰나 했을 정도였어요.”
엄태리는 보아스 역에 김다현과 더블 캐스트인 이지훈과 아주 특별한 인연이 있다. 시간을 되돌려 2007년 MBC 예능프로그램 ‘스타의 친구를 소개합니다’에 방송인 김나영의 고교 동창으로 출연했다가 이지훈과 함께 나온 친구와 소개팅이 성사됐던 일화가 있다. 하지만 ‘루쓰’로 다시 만난 이지훈이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엄태리는 “‘루쓰’에서 나오미와 보아스가 붙는 장면이 거의 없어 얘기를 나누기가 어렵다”면서 “나를 뮤지컬 배우로만 알더라”며 샐쭉해 했다.
엄태리는 중앙대 연극영화학과 출신으로 김래원 장나라 하정우 등과 동기다. 후배 정경호, 현빈 등과도 함께 작품을 하면서 배우의 꿈을 키웠다. 동기와 선후배들이 연예계에 진출해 스타가 되는 동안 그는 오히려 철저히 무대 예술에만 전념했다. 예술가적 완벽성에 초점을 뒀던 어리석음이었다.
“팬들이 왜 작품을 많이 안 하느냐고 화를 내더라고요. 다작도 피하고, 하고 싶거나 연구하고 싶은 작품만 파던 시기가 있었어요. 그게 뒤늦게 굉장히 죄송하게 느껴졌어요. 이제는 관객이 즐길 수 있는 작품을 많이 하는 게 소망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