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 공개된 이후로 “신파가 짙다”와 “한국형 SF의 좋은 예”라는 엇갈린 평가를 받으면서도 글로벌 화제작으로 떠오른 ‘정이’의 연상호 감독을 최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그는 신파라는 비판에 대해 “당연히 예상했던 일”이라고 털어놨다.
“신파가 어떻게 보면 대중에게 굉장히 미움을 받는 장르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비판이 있을 거라는 건 당연히 예상은 했어요. 그런데 저는 신파를 한국의 멜로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나쁘다고 보지 않고 문제라고도 생각하지 않아요. 어떻게 보면 전달하고 싶은 바를 굉장히 편하게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죠. 사실 신파가 비판을 받는 건 ‘너무 편의성을 추구하는 방법 아닌가’라는 생각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해요. 막상 해보니 오히려 연출하기 까다로운 장르더라고요. 효과적인 방식이기도 하고요.”
‘정이’는 기후변화로 폐허가 된 지구를 떠나 사람들이 이주한 쉘터가 배경인 SF 영화다. 이 쉘터에서 발생한 전쟁을 끝내기 위해 전설적인 용병 정이(김현주 분)의 뇌를 복제, 최고의 전투 AI를 개발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고(故) 강수연이 정이 개발 프로젝트의 책임 연구원으로 분해 김현주와 모녀로 호흡을 맞췄다. 김현주는 강수연이 맡은 윤서현의 엄마 역으로 전투에서 크게 다쳐 식물인간이 된 상태로 늙어가는 인물울 연기했다.
윤서현은 최적의 전투로봇을 만들겠다는 미명 하에 자신의 엄마인 정이의 복제들이 사망하고 고문당하는 장면을 계속해서 목격해야 했고, 결국 정이가 가진 모성애를 끊어냄으로써 딸로서의 도리를 다하고자 한다. 근미래, 폐허가 된 지구, 디스토피아 등 배경은 스케일이 크고 거대하지만, 영화에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만큼은 인간성의 회귀, 모성애 등 인간적이기 그지없는 셈이다.
연상호 감독은 서현이 정이의 모성애를 끊어내는 장면이 바로 ‘정이’의 시작이었다고 이야기했다. 엄마에게서 모성을 삭제하는 것이 해방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딸의 이미지를 통해 ‘정이’라는 한 편의 거대한 이야기를 떠올렸다는 것이다.
“서현이 그런 선택을 내린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봤어요. 첫 번째는 전쟁이 가져오는 존재론적 회의감이죠. 왜 시작됐는지도 모르는 채 40여 년간 이어졌던 전쟁이 갑자기 끝나버린 거예요. 왜 끝이 났는지도 모르게. 거기에서 존재론적 비참함을 느꼈을 것 같아요. 또 하나의 계기는 자신의 엄마를 우상화했던 한 남자죠. 그가 전쟁영웅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엄마를 우상화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는 걸 포착하곤 그런 결단을 내리게 돼요. 엄마를 진짜 영웅으로 만들고 싶다는 의지 같은 것이었겠죠. 모성을 끊어낸다는 것은 서현과 복제한 로봇이 나눈 유일한 유대를 끊어낸다는 것과 같아요. 애초에 그런 결말을 바랐어요.”
서현이 엄마인 정이에게 해준 건 어쩌면 미미한 한 마디였을지 모른다. 정이에게 실제 사람이 아닌 복제 로봇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자신에게 얽매이지 않도록 끊어낸 것. 아이의 아빠인 연상호 감독은 “부모 입장에서 자식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사실 그렇게 대단한 게 있지는 않은 것 같다”며 “기도하고 빌어주는 것, 정말 사랑하는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실은 그 정도뿐이지 않을까 싶다”고 이야기했다.
“어떻게 보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독창적이면서 유일한 방법이잖아요. 축복과 행운을 기원해준다는 것은요. 아이를 낳으면 아이에게 뭘 해줄 수 있을까를 정말 많이 생각하게 되는데요, 많이 해준다고 좋은 것도 아니고 어떨 때는 놔줄 줄도 알아야 하는 것 같아요. 그러다 보면 정말 내가 자식에게 해줄 수 있는 건 별 게 없다는 걸 알게 되죠.”
이런 복잡다단한 마음이 ‘정이’의 서현에게 깊게 녹아들어 있다. 엄마를 영웅으로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과 엄마의 복제들이 계속해서 살해당하는 것만 같은 괴로움 속에서 서현은 간신히 평정심을 유지해나간다. 단순히 ‘신파’라고 보기엔 너무나 복잡하다. 연 감독 역시 서현의 감정선이 어려웠다고 털어놨다.
“진짜 생각을 많이 했어요. 서현이에게 진짜 엄마는 분명히 따로 있죠. 식물인간이 된 상태로 누워 있으니까. 그런데 엄마랑 똑같이 생긴 로봇들이 똑같은 환경에서 죽어가요. 자신에겐 그 복제들이 처한 환경을 조절할 힘이 있고요. 그런 상황에서 로봇과 관계성을 끊어낸다는 건 어떤 것일까 생각을 많이 했어요. 또 너무 어려우면 안 되는 감정선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강수연은 그런 서현 역을 맡아 놀라운 연기력을 보여줬다. 특히 후반부 복제된 정이와 독대하는 장면은 영화의 하이라이트다. 줄곧 감정을 머금다 터뜨려야 하는 장면이었기에 배우도 감독도 공을 많이 들였다.
“강수연 선배가 ‘감정을 어느 정도까지 표현해야 하느냐’고 하시더라고요. ‘100을 다 보여 달라’고 했어요. 앞에서 계속 참고 있었기 때문에 그 부분에선 100을 다 보여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실제로 한 150 정도를 보여주시더라고요. (웃음) 현장에서는 소름이 일 만큼 전율이 있었는데, 그걸 다 시청자들께 보여드리면 오히려 전달이 안 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음소거를 하고 감췄죠. 보시는 분들이 상상할 수 있도록요.”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부터 누적 관객 수 1000만을 돌파한 ‘부산행’을 지나 ‘정이’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탁월한 상상력으로 한국 콘텐츠 시장에 신선한 작품을 보여주고 있는 연상호 감독. 그는 “아직 내가 성숙하지 못 한 인간이라 그런지 꽂히는 작품을 하고 싶더라”며 웃음을 보였다.
“작은 것 하나라도 꽂히면 그게 제가 창작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 같아요. 조금 더 성숙한 연출자가 되면 그렇지 않은 작업도 할 수 있겠죠. (웃음) 일단 지금 콘텐츠계는 극적 변화가 있는 시기라고 생각해요. 이런 변화에 몸을 맡겨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