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가 앞으로 30년 동안 ‘일본에는 손을 댈 수 없다’는 느낌이 들도록 이기고 싶다.”
17년 전 제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의 한⋅일전을 앞두고 나온 스즈키 이치로(50)의 발언은 한국을 크게 뒤흔들었다. 이치로의 발언은 다소 자극적으로 번역되면서 한국 야구팬과 선수들의 투지를 뜨겁게 불태웠다. 당시 이 말에 자극받은 한국 대표팀은 2006년 대회 예선에서 일본에 2연승을 거두며 마운드에 태극기를 꽂았다.
이후에도 한국은 한⋅일전이 있을 때마다 이치로의 발언을 재조명했다. 이는 2009년 2회 대회까지 이어져 대표팀의 선전을 이끌었다. 한 수 아래라 평가됐던 한국은 2차 대회까지 일본과 4승 4패로 어깨를 나란히 했고, 매 경기 손에 땀을 쥐는 경기를 연출했다.
그 과정에서 망언의 주인공 이치로의 엉덩이를 가격한 배영수가 ‘배열사’로 등극했다. 이어진 2009년 대회에선 이치로를 견제한 봉중근이 ‘봉열사’라는 별명을 얻으면서 국민을 열광케 하기도 했다. 이처럼 이치로의 발언은 한국 대표팀에 좋은 자극제가 되어 한국의 선전을 이끌었다.
그로부터 17년 뒤, 한국과 일본이 WBC 무대에서 다시 만났다. 제5회 WBC 대회에서 한 조(B조)에 묶인 두 팀은 3월 10일 도쿄돔에서 본선 1라운드 맞대결을 펼친다. 프리미어12나 올림픽, 아시안게임에선 종종 마주치긴 했지만, 메이저리거들이 총출동해 최고의 전력으로 상대하는 WBC에서의 맞대결은 지난 2009년 결승전 이후 14년 만이다.
하지만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이치로의 발언처럼 자신감을 넘어 오만함까지 보였던 17년 전과는 달리, 이번엔 신중하고 조심스러워하는 모습이다. 현재 일본 WBC 대표팀에서 당시 이치로와 비슷한 위치에 있는 오타니 쇼헤이(29·LA 에인절스)는 “한국에는 훌륭한 선수가 많다. 한국은 세계 무대에서 싸울 수 있는 선수들이 있는 팀이다. 훌륭한 야구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을 얕잡아 보지 않는다는 의미다.
구리야마 히데키 일본 WBC 감독의 자세도 비슷했다. 구리야마 감독은 지난해 일본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과 늘 격전을 펼친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모든 것을 걸고 잘 대비하겠다”라며 한⋅일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지난해 가을엔 한국 선수들의 기량을 점검하기 위해 방한했을 땐 “한국은 저력이 있는 팀이다”라며 방심을 경계하기도 했다. 17년 전과는 사뭇 다른 신중한 분위기가 일본 대표팀 내에 형성되고 있다.
2006년 쓰라린 경험이 지금의 분위기에 영향을 끼쳤다. 일본 매체 도쿄스포츠는 “이치로의 발언은 한국 선수들에게 동기부여가 됐다. 이치로의 30년 발언은 사무라이 재팬의 큰 오점이 됐다”라고 비판하면서 “세계 제일을 목표로 하는 일본이 도발 행위를 금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일 것이다. 일본은 오타니처럼 상대를 공경하는 마음으로 어려운 싸움을 이겨내고자 한다"며 오타니의 신중한 자세를 칭찬했다. 이치로의 도발이 역효과를 낳은 경험을 거울삼아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않겠다는 의지다.
일본은 이번 대회에서 초호화 멤버로 나선다. 오타니를 비롯해 다르빗슈 유(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스즈키 세이야(시카고 컵스) 등 현역 빅리거들이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지난해 56홈런으로 일본프로야구 최연소 홈런왕에 오른 무라카미 무네타카(야쿠르트 스왈로즈)나 최고 163km의 광속구 루키 사사키 로키(지바 롯데) 등 자국 내 특급 선수들도 출격 준비를 마쳤다. 어느 때보다 우승의 가능성과 의욕이 충만한 상황. 하지만 일본은 17년 전 한국의 투지를 경계하면서 정중동의 자세로 한⋅일전과 WBC를 준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