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의 작가 보르헤스는 ‘아스테리온의 집’이라는 단편소설에서 미노타우로스 신화를 패러디했다. 아테네의 왕자 테세우스가 미궁에서 황소의 머리를 한 반인반우(伴人伴牛)의 괴물 아스테리온과 대적했을 때, 실은 용감하게 싸워 처단한 것이 아니라 미궁 속 외로움에 지쳐 죽고자 하는 그를 간단히 해치웠을 뿐이며, 그 괴물이 소문처럼 사람을 잡아먹지도 않았음을 강조한다. 우리가 막연히 생각했던 괴물의 존재는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영화 ‘더 웨일’은 272kg의 거구로 괴물처럼 보이는 대학의 글쓰기 강좌의 강사 찰리(브랜던 프레이저)가 주인공이다. 그는 과거 캠퍼스에서 만난 제자와 사랑에 빠지면서 아내와 딸을 버렸지만, 게이 연인이 죽고, 그 회한과 죄책감으로 아파트를 미궁 삼아 그 속에서 나오지 않는 삶을 지속한다. 신경성 폭식증으로 자신을 학대하면서 살아간다. 무거운 몸으로 한 걸음 내딛기도 어려워 보조기를 사용해야만 걸을 수 있고, 울혈성 심장병이 심해져 자주 호흡곤란과 가슴통증에 시달리면서도 병원에 가지 않는다.
딸에게 물려줄 돈을 모으는 게 자신의 목숨보다 절실했던 그는 건강보험에도 가입하지 않았으며, 위급상황에 구급차 부르는 경비도 아낀다. 간호사인 과거 연인의 동생 리즈(홍차우)가 집으로 자주 찾아와 죽은 오빠에 대한 사랑에 보답하듯 찰리에게 정성껏 응급조치를 해주지만 며칠 못 살게 될 것을 알게 된다. 찰리는 가슴 깊이 자리잡은 부성애로 이제 17살이 된 딸 엘리(새디 싱크)에게 연락을 한다. 남편과 헤어진 충격으로 아내 메리(사만다 모튼)는 알콜중독자가 됐고, 문제아로 자란 엘리는 10년 만에 웬 연락이냐며 아빠에게 폭언과 분노를 폭발한다. 하지만 찰리는 다정한 눈빛으로 딸에게 그동안 모은 12만 달러를 줄 테니 자신에게 글쓰기를 배워 과제를 수정하라고 권한다.
이 영화는 희곡작가 사무엘 D. 헌터가 쓴 동명의 연극이 원작이어서 공간은 거의 찰리의 아파트에 한정되어 있다. 이 한정된 공간에 배우들의 연기로 밀도를 더한다. 찰리 역의 브랜던 프레이저는 ‘더 웨일’로 미국 크리틱스 초이스 및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고,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로 수상이 유력하다. 리즈 역의 홍차우도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이다. ‘블랙 스완’과 ‘더 레슬러’, ‘마더!’ 등으로 알려진 대런 아로노프스키가 연출한 이 영화는 베니스 영화제 경쟁부문에도 초청됐다. 전작에서 보여준 기독교에 대한 성찰, 캐릭터의 회환 어린 심경이나 심리적 표현 등의 탁월함은 ‘더 웨일’에서도 여전할 뿐더러 이번에는 문학적 상징성까지 돋보인다.
찰리는 이혼한 아내에게 받은 딸 엘리의 ‘모비딕’에 대한 에세이를 마르고 닳도록 암송한다. 반항적인 딸에게 자신이 쓴 에세이를 소리내어 읽어보라고 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똑똑하며 글을 잘 쓰는지 인식하기를 바란다. 그러면서도 영화는 ‘모비딕’에서 에이허브 선장의 흰고래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복선으로 깔면서 삶의 진실을 담아낸다.
찰리는 자신의 화상수업을 듣는 수강생들에게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논지의 구성보다 논지의 진실성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괴물 같은 자신의 모습을 보고 역겹다고 생각할 반응이 두려워 화상 수업에서 늘 비디오를 꺼둔 상태에서 수업하던 찰리는 생명이 언제 꺼질지 모르겠다고 생각한 날, 진실성을 한번 더 강조하면서 비디오를 켜 자신의 몸을 수강생에게 보여준 후 노트북을 던져버린다.
‘더 웨일’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담긴 가족사랑을 강조한다. 퉁명스럽게 대해도 리즈와 아내는 진심으로 찰리를 아낀다. 한편으로 찰리는 리즈에게 딸의 행동을 칭찬하면서 ‘사람은 인간에게 무관심할 수 없다, 사람은 놀라운 존재’라고 피를 토하듯 강조한다.
상처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찰리의 괴물같은 겉모습은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 내재한 상처 같은 괴물성을 상징하는지도 모른다. 우리 안에 자리 잡은 미노타우로스 같은 상처는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을 이 영화는 역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