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가 하늘 위로 물기둥을 뿜으며 솟아오를 때 사람들은 비로소 알게 된다. 그가 얼마나 깊은 심해에서 숨죽이고 있었는지. 폭발하듯 터져오르는 물줄기와 포효. 브렌든 프레이저는 영화 ‘더 웨일’에서 마치 수톤에 달하는 고래와 같은 존재감으로 스크린을 집어삼킨다.
‘더 웨일’은 272kg의 거구로 살아가는 대학 강사 찰리(브렌든 프레이저)가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음을 느끼고 오랫동안 만나지 못 한 10대 딸 엘리(세이디 싱크)를 집으로 초대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브렌든 프레이저는 300kg에 육박하는 거구의 남성 찰리를 연기했다.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중반까지 이어진 ‘미이라’ 시리즈로 할리우드 스타가 된 브렌든 프레이저는 사실 그 외에는 이렇다 할 대표작이 없었다. 큰 히트작이나 연기력을 인정 받을만한 작품이 없었던 상황에서 ‘더 웨일’은 ‘한 물 간 배우’라는 브렌든 프레이저의 필모그래피를 단숨에 반전시켰다.
꽃미남 같은 외모와 늘씬한 몸매로 ‘미이라’에서 화려한 액션과 볼거리를 안겼던 브렌든 프레이저는 ‘더 웨일’ 속 찰리를 연기하기 위해 한 번에 5~6시간씩을 특수분장에 사용했다. 구체적인 무게는 공개되지 않았으나 배역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기 위해 실제 체중 증량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더 웨일’은 고통과 구원에 대한 영화다. 272kg이라는 몸무게가 표현하는 건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찰리의 고독과 고통. 뉴라이프 전도사가 찰리에게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게 도와주겠다고 등장하는 장면부터 ‘더 웨일’은 계속해서 ‘구원’이라는 키워드를 호출하는데, 결국 구원을 가능케 하는 건 다른 어떤 것도 아닌 고통의 직시다. 자신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마주할 때야만 비로소 사람은 그것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모비딕’은 또 다른 중요한 소재다. 찰리의 딸 엘리가 어린 시절 썼던 에세이는 ‘모비딕’을 주제로 한다. 수많은 뱃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모비딕. 인간들은 그런 모비딕을 죽이는 데 일생을 바치지만 고래 모비딕은 그런 인간들의 염원과 고통에 초연한 존재. 고래를 죽인다고 그로 인해 받은 고통이 해소될까. 엘리의 눈엔 그 모든 일이 덧없어 보일 뿐이다.
사람들은 자꾸만 타인의 고통을 끄집어내는 엘리가 ‘악마’로 보인다. 하지만 찰리는 눈치챈다. 딸 엘리가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관심을 두고 그것을 수면 위로 올리려는 건 상대를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치유하기 위해서라는 걸.
브렌든 프레이저는 그런 면에서 ‘더 웨일’의 찰리와 닮았다. 그의 빈약한 필모그래피에는 그가 업계에서 당했던 성추행과 잦은 부상, 이로 인한 수술, 성대 결절, 아내와 이혼 등 짙은 가정사가 있다. 이 같은 고통 속에서도 프레이저는 끝까지 배우의 길을 놓지 않고 걸어 ‘더 웨일’에 이르렀다. 마침내 자신의 고통과 마주하며 모비딕처럼 솟아오른 찰리처럼 브렌든 프레이저 역시 이 작품을 통해 묵직한 존재감을 보여주며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입증했다. 브렌든 프레이저는 한국 시간으로 13일 오전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 극장에서 열리는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가장 강력한 남우주연상 후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