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을 내서 가상자산(가상화폐)이나 주식에 투자를 하던 MZ세대가 이제는 '거지방'에 모여 절약 정신을 나누고 있어 눈길을 끈다. 절약하는 방법을 공유하기도 하고 서로의 소비를 평가해주는 등 일상에서 돈을 아낄 수 있도록 독려하는 것이 핵심이다.
거지방이 뭐길래
26일 업계에 따르면 MZ세대가 주로 이용하는 SNS 인스타그램에는 지난해 말 '절약'이라는 단어가 1년 전보다 485%나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페이스북에서도 같은 시기에 빚, 즉 원금을 조금씩 나눠 갚는 분할 상환 대출에 대한 대화가 전 세계적으로 1년 전에 비해 무려 1671%나 늘었다.
이런 트렌드는 국내에서 '거지방'이라는 해학적 커뮤니티로 발현됐다. 개인의 소비·지출 내역을 메신저상에서 공유하고 평가를 주고받는 이른바 ‘거지방’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것이다.
거지방은 카카오톡 오픈 채팅방에 많게는 수백명이 모여 과도한 지출을 막기 위해 서로를 채찍질한다. 이들 방은 ‘재테크’ ‘절약’ ‘구두쇠’ ‘지출기록’ 등의 키워드로 해시태그를 걸어놓고 사람들의 유입을 유도한다.
방법은 한 달 목표 생활비를 정해두고 지출 내역을 공유한다든지, 물건을 사기 전에 허락을 받는다든지, 전국 무료급식소 위치를 알려주는 등 돈을 아끼는 방법을 나누는 것이다.
실제로 한 거지방에 들어가봤더니 '이모티콘은 무료만 써주세요. 지출 내역 올려주시면 쓴소리 해드립니다'라는 공지글이 눈에 띄었다. 한 참가자가 "달달한 거 사먹어도 되나요"라고 묻자 곧장 "안됨" "설탕 한 스푼 가능" 등의 답이 돌아왔다.
거지방에 대해 이성림 성균관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궁핍함을 모르는 풍요로운 환경에서 성장한 젊은 세대들이 당연시 했던 소비를 줄이는 데서 오히려 새로운 재미를 느끼고 놀이로 승화시켜 즐기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이 교수는 "불필요한 소비와 마케팅에 의한 소비 유혹이 가득한 세상에 대한 젊은이들 특유의 일종의 저항 문화적인 요소도 찾아볼 수 있다"며 "경제적으로, 환경적으로, 불평등이 만연한 사회에서 치유의 힘이 있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기 때문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즐거움과 재미있는 요소가 가미되면 상당히 오래 지속되거나 확산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빚투에서 '절약'으로
1년 전까지만 해도 명품 소비에 열광하고 거침없이 코인 등에 투자하던 분위기와 정반대로 '절약'이 화두로 떠오른 모습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30대 이하 청년층 취약 차주는 작년 한 해에만 4만명 늘어난 것으로 조사됐다.
지난해 말 기준 30대 이하 청년층 취약 차주는 46만명으로 집계됐다. 이는 전체 취약 차주(126만명)의 36.5%다. 전체 취약 차주는 1년 동안 6만명 증가했는데, 30대 이하 청년층에서만 4만명이 늘어났다.
사회적 기업 에듀머니가 국회사무처에 제출한 '가계부채 위험성 관리를 위한 입법 및 정책 과제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최근 5년 6개월간 신용대출 이용 잔액은 2030세대에서 70% 증가했다. 이 세대의 저축은행 신용대출 증가율은 은행권보다 심각한 수준인 162.5%였다.
금융권의 주택담보대출 증가율 또한 전 세대 증가율이 2017년 대비 2022년 6월 말 514조원으로 5년 6개월간 34% 증가한 것과 비교해 2030세대의 주택담보대출 잔액 증가는 66%였다. 은행권의 주택담보대출을 이용 중인 2030세대 1인당 대출은 1억3000만원으로 4050세대 1억2900만원을 추월했다.
저금리 시대에 '빚투'(빚내서 투자), ‘영끌’(영혼까지 끌어 모아 대출)에 나섰던 청년층이 금리가 급격히 치솟자 후폭풍에 직면했다고 금융권은 입을 모은다. 여기에 물가 급등과 경기침체 공포가 확산되면서 이제는 절약 열풍이 불고 있다는 분석이다.
지난해 MZ세대를 중심으로 ‘무지출 챌린지’가 유행하고 강도 높은 절약을 뜻하는 ‘짠테크’(짜다+재테크)가 재등장한 사회적 분위기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또 편의점 도시락 소비가 급증하고 알뜰폰의 급성장 역시 MZ세대의 절약 트렌드가 견인하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그동안 소비하고 여행하는 것을 자랑해 왔지만, 최근 경제 상황이 안좋아지면서 취업이 잘되는 것도 아니고 주식이나 코인 투자도 안되고 '현타'(현실 자각의 시간)가 와서 극복하려는 것"이라며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할 수 없다고 했다. 거지방은 짠테크나 무지출 챌린지의 연장선이다. 경제가 좋아질 때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구조적 해결책도 병행돼야 한다. 가계가 파산하면 불안정이 국가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개인이 놀이식으로 만든 '거지방' 트렌드를 비판적으로 볼 것만은 아니다. 문화가 심각하게 변화하면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