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 골퍼가 자신에게 딱 맞는 맞춤형 클럽을 찾는 건 굉장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특히 2000년대 들어 런치 모니터, 트랙맨 등의 첨단 장비 도입과 함께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한 클럽 피팅(club-fitting)이 활발히 이뤄졌다.
야구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휘두르기 편하면 결과는 자연히 따라온다.' 타자들은 정확한 수치나 데이터가 아닌 추상적인 느낌에 의존해 배트를 뽑아 들었다.
하지만 최근 미국 루이지애나주 배턴루지에 위치한 한 연구 시설이 야구와 클럽 피팅을 접목해 장비 혁신을 주도하고 있다. 이들은 여러 첨단 기술을 활용한 과학적 분석으로 맞춤형 배트를 제공한다. 이곳을 방문한 선수들이 2021년부터 본격적으로 성공을 맛보면서 이러한 '배트 피팅(bat-fitting)'을 찾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배트 피팅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는 지난해 메이저리그(MLB) 내셔널리그(NL)최우수선수(MVP) 투표 1위와 3위를 차지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폴 골드슈미트와 놀란 아레나도다. 이들 곁에는 독특한 노브(배트 손잡이 끝부분)의 마루치 배트가 함께 했다. 2022년 126경기 5홈런에 그쳤던 브렌단 도노반은 올봄 맞춤형 배트로 19경기에서 4개의 홈런을 날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배트 피팅의 역사는 2020년 시작됐다. 골프를 연구하던 골프랩(The Golf Lab) 산하 부서인 BPL(Baseball Performance Labs)와 마루치 스포츠가 파트너십을 체결하면서 시작됐다.
BPL은 '효율'이라는 키워드를 내세웠다. 그들은 타자들이 보다 더 효율적으로 스윙할 수 있는 배트를 찾아 나섰다. 또한 생체역학 분석 장비를 이용, 주관적인 '느낌'을 중시하던 기존 흐름과 반대로 객관적인 분석을 모토로 삼았다. 물론 그렇다고 주관이 아예 배제되는 건 아니다. 배트 잡고 휘두르는 건 결국 선수이기 때문에 배트를 선별하는 동안 그들의 선호 역시 반영된다.
BPL의 배트 피팅은 해당 선수의 신체 사이즈와 근력을 측정하는 것부터 출발한다. 다음으로 각 신체 부위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확인한다.
여러 테스트를 거쳐 수집한 데이터는 BPL에서 자체 고안한 'BPII(Balance Point Index)'라는 지표를 산출하는 데 활용된다. 1~100 사이로 표시되는 BPI는 스윙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의 양을 의미한다. BPL은 배트의 길이와 무게, 그리고 무게 배분을 조합해 각 배트의 BPI를 계산했다. 이를 앞서 구한 타자의 고유 BPI에 대조하면서 선택지를 하나 둘 줄여 나갔다. 더불어 선수의 니즈와 특성을 고려해 손잡이의 두께, 노브의 종류 등 디테일한 변화를 줘 최종적으로 최고의 퍼포먼스를 낼 수 있는 배트를 만들어냈다.
미국 스포츠전문 매체 디 애슬레틱에 따르면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오스틴 라일리는 몸 쪽 공과 싱커에 대한 대응력을 높이고자 BPL을 찾았다. BPL은 기존보다 길고 무거운 방망이를 추천했다. 그러면서 골드슈미트, 아레나도처럼 아이스하키 퍽 모양의 노브를 달아 무게 중심을 손에 가깝게 배치했다. 스윙을 더 가볍게 만들기 위해서다. 골드슈미트는 지난해 3월 지역 매체인 세인트루이스 포스트-디스패치와의 인터뷰에서 약 28g 무거워진 하키 퍽 배트에 대해 "기존에 쓰던 것과 비슷한 느낌을 주면서도 스윙하기 더 편해졌다"고 말했다.
기술이 발전하고 최첨단 장비들이 적극 도입됨에 따라 생체역학 분석은 이제 현대 야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됐다. MLB 대다수의 팀이 자체적으로 생체 역학 분석 시스템을 구축한 가운데 KBO리그 역시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움직이고 있다.
다만 과학적 분석에 따른 타자들의 발전은 투수들보다 그 속도가 느렸다. 투수들이 숨겨진 구속을 발견하고, 변화구를 더욱 날카롭게 다듬는 동안 타자들은 마땅한 카운터를 날리지 못했다. 최근 4년간 리그 타율이 꾸준하게 떨어진 가운데 지난해 MLB 타자들은 1920년 라이브볼 시대 이래 3번째로 낮은 타율(0.243)을 기록했다.
타자들의 발전속도가 더뎠던 건 투수들에 비해 더 많은 변수를 고려해야 했기 때문이다. 투구는 자기 자신만 통제하면 끝이지만, 타자의 스윙은 투수와의 상호작용에서 비롯된다. 투구와 달리 타격은 일관된 움직임을 꾸준하게 가져가기 힘들다는 점도 영향을 줬다.
그럼에도 BPL처럼 과거 경험과 느낌에 의존했던 영역을 정량화하려는 노력이 꾸준하게 이뤄지고 있다. 2020년 MLB가 광학 카메라 방식의 호크아이 시스템을 채택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이에 타자들도 더 많은 영역에서, 그리고 정확한 데이터와 정보를 통해 자신의 기술과 능력을 점검할 수 있게 됐다. 크리스 안토네티 클리블랜드 가디언스 사장이 3월 AP통신과 인터뷰에서 "지난 몇 년 동안 업계 내에서 타격과 관련된 하이테크 기술과 이를 통해 타자들을 지원하려는 노력이 가속화되고 있다"고 전한 것처럼 이제 타자들은 첨단 기술과 함께 진화를 준비하고 있다.
BPL의 설립자인 리암 머클로는 자신들의 웹사이트에 BPL을 "피치 디자인(투수의 특성에 따라 투구 스타일을 정립하는 작업)을 날려버릴 배트 디자인을 작업하는 곳"이라 소개한다. 시프트를 제한하고 달리는 야구를 권장하는 MLB 리그 환경도 타자들의 반격을 돕고 있다. 새로운 환경 속에서 배트 피팅이 과연 반격의 신호탄이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