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2021 신인 드래프트 2차 지명을 앞두고 각 구단 스카우트가 물밑에서 바쁘게 움직였다. 학교 폭력(학폭) 이력이 수면 위로 떠오른 몇몇 유망주의 지명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해 8월 NC 다이노스가 1차 지명 투수 김유성(현 두산 베어스) 지명을 철회하는 '사건'이 있었다.
김유성은 내동중 3학년 여수 전지훈련 때 후배의 명치를 가격, 학교폭력위원회로부터 출석정지 5일 징계가 내려졌다. 관련 사건이 고소까지 이어졌고 창원지방법원의 화해 권고마저 성립되지 않아 20시간 심리치료 수강, 40시간 사회봉사 명령을 받았다. 1차 지명 뒤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피해 사실을 알려 NC는 김유성 영입 의사를 접었다. 프로야구 1차 지명 역사상 구단이 지명을 포기한 건 사상 초유의 일이다. 한 달 뒤 예정된 2차 지명에서 '학폭'이 이슈 키워드가 된 건 당연한 결과였다.
결과는 어땠을까. 학폭 의혹에 휩싸였던 선수들이 대부분 프로 유니폼을 입었다. 구단들은 해당 선수를 지명한 뒤 "피해자와 합의했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여기서 말하는 '합의'는 금전적 보상이 대부분이다. 결과가 이렇게 되니 "합의하지 못한 김유성만 억울하게 됐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이후 상황도 비슷하다. 스타플레이어 출신 아들이 학폭 문제로 시끄러웠지만 무난히 드래프트 문턱을 넘었다. 지난해에도 '학폭 이력' 야수의 이름이 드래프트장에서 호명됐다. 하나같이 그 뒤에는 "합의해서 문제없다"는 해명이 이어졌다. '학폭'을 구단들이 어떻게 바라보는지 여실히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구단들이 두려워하는 건 여론이다.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호소하는 순간 많은 비난이 쏟아진다. 학폭을 두고 피해자와 합의 여부를 가장 신경 쓰는 이유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가해자들도 드래프트 전 '합의'에 집중한다. '학폭'을 왜 했는지 문제 삼기보다 합의가 됐으면 문제없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김유성은 프로 유니폼을 입었다. NC 입단이 좌절된 뒤 고려대로 향한 그는 2학년 재학 중에 얼리 드래프트에 도전, 지난해 2라운드 전체 19순위로 두산에 지명됐다. 그리고 최근 피해자와 합의를 마쳤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두산은 김유성을 1군에 등록, 데뷔전(4월 28일 SSG 랜더스전)까지 속전속결로 마쳤다. 두산과 김유성을 나무랄 이유는 사실 크지 않다. 현재 프로야구에는 학폭 이력이 드러나지 않은, 이른바 '합의한' 가해자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학폭'을 저질렀다고 해서 선수 생명이 끊기는 건 아니다. "순간의 실수를 반성할 기회라도 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말하는 야구 관계자도 있다. 하지만 설익은 온정주의가 학폭의 싹을 자르지 못하는 이유가 되진 않을까. 최근 프로야구 A 구단 단장의 아들 학폭 이슈로 프로야구가 떠들썩하다. 이미 기사로 다뤄지기 전부터 몇몇 스카우트 사이에선 관련 내용이 돌았다. 김유성 사태 이후 프로야구는 크게 변한 게 없다. 학폭을 저질렀어도 합의만 하면 문제없다는 안일한 인식 속에 '악의 연대기'는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