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가요계에는 전업가수들이 많지 않다. 사업을 하면서 또는 직장을 다니면서 자신의 노래를 발표하고 기회가 생기면 행사 무대나 방송 무대에 출연하는 이른바 투잡 가수들이 상당수다.
노래만 가지곤 생활이 되질 않고, 그렇다고 좋아하는 노래를 포기하긴 싫은 이들이 바로 그 가수들이다. 낮이나 평일에는 일하고 밤과 휴일에는 무대에 서는 방법으로 노래를 부른다.
그런 투잡 가수 중에 ‘대전에서 내려야 하는데’(김병걸 작사·노영준 작곡)라는 노래로 관심을 끌고 있는 가수가 있다. 이 노래에 대한 이야기를 2020년 기자의 블로그(석광인닷컴)에 소개한 일이 있다.
그런데 얼마 전 이 블로그에 새로운 댓글이 올라왔다. “이분을 어떻게 모실 수 있나요? 행사나 콘서트는 안 하시는지요? 할머니가 너무너무 팬이셔서 그래요. ‘대전에서 내려야 하는데’만 하루 종일 듣고 계세요”라는 내용이었다. 전화번호를 남기면 가수가 직접 연락하도록 하겠다는 답신을 올리자 전화번호를 적어와 가수에게 전달을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연로하신 할머니가 너무 좋아하셔서 하루 종일 그 노래만 들으신다는 이야기에 솔직히 놀라고 말았다. 손주가 그 노래를 부른 가수의 무대를 직접 보시도록 주선하려 한다는 사실에는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대길은 일반 가요팬들에겐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밤무대 관계자들 사이에선 노래 잘 부르는 가수로 유명했다. 특히 기막힌 박자 감각을 지닌 가수로 정평이 나 있었다.
나대길이 지난 2018년 발표한 ‘대전에서 내려야 하는데’는 남자라면 누구라도 젊은 시절 한번쯤 겪었을 법한 경험담을 그린 재미있는 내용의 곡이어서 많은 팬들이 공감하며 박수를 보낸다. 특히 유튜브에서 23만회의 조회 수를 기록하기도 했고 다른 가수들과 노래강사들이 부른 동영상들도 인기가 높아 유튜브 히트곡이라 할 만하다.
‘대전에서 내려야 하는데’의 가사 내용은 이렇다. 열차를 탔더니 앞좌석에 마음에 드는 여성이 앉아 있었다. 어떡하든 말을 걸고 싶은데 혼자 애만 태우다가 목적지인 대전역에서 내리지 못하고 결국 부산까지 따라가고 말았다. 말도 걸지 못하고 망설이는 사이에 무심한 여자는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않은 채 사라졌다. 바닷바람에 헛기침을 날리고 항구의 날씨가 고약하다면서 엉뚱한 바람만 원망한다. 노랫말에 저절로 웃음이 나오는 전형적인 트롯이다.
나대길은 구수하게 이 노래를 부르지만 어째서인지 쓸쓸하고 허무한 분위기를 풍긴다. 마음에 드는 여성을 보았는데 한마디도 못하고 돌아오는 허탈한 심정을 애절하면서도 감칠맛 나게 노래했다.
공주시의 농가에서 태어난 나대길은 고교 졸업 후 가수가 되겠다며 무작정 상경을 했다. 한 야간업소를 지나다가 대책도 없이 들어가 노래를 하고 싶으니 시켜달라고 막무가내로 졸랐다.
지배인이 다음날 몇 시쯤 와보라고 해 다시 찾아가 보니 15인조 악단의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불러야 한다며 악보를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경험이 없어 악보를 준비하지 못했다며 밴드 마스터에게 부탁해 나훈아의 ‘사랑은 눈물의 씨앗’을 부르게 됐다.
얼결에 악단의 반주에 노래하다 보니 스스로도 너무 자신 없게 불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계천 세운상가에 있던 아마존이라는 비어홀이었는데 며칠 후부터 무보수로 그곳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르게 됐다.
얼마 후에는 무교동 엠파이어 비어홀의 무대에도 서기 시작했다. 역시 무보수였지만 몇 달 후부터는 약간의 출연료를 받으면서 본격적인 밤무대 가수 생활을 시작했다.
밤무대 가수로 10여년 노래하다가 안양에서 도매업 등 개인 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밤무대가 점점 줄어 수입도 줄었기 때문이다.
사업과 밤무대 가수로 활동을 병행하며 2013년 청호라는 예명으로 ‘어쩌란 말야’와 ‘소풍’이라는 노래를 발표하며 자신의 노래를 갖게 됐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오기 전까지 서울 장안평 무학성 카바레 등의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불렀다. ‘대전에서 내려야 하는데’와 함께 발표한 애절한 창법의 ‘이 근처에서’(김병걸 작사·정재우 작곡)에 대해서도 팬들은 좋은 반응을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