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어진 특정 상황에서 4시간만 버텨내면 된다. 디즈니+ ‘더 존: 버텨야 산다’(이하 ‘더 존’)는 어찌 보면 간단해 보이는 룰로 시작했다. 겨우 4시간이다. 그 상황이 뭐든 결코 길게 느껴지지 않는 그 시간은 이 버티기가 뭐 그리 어렵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하지만 작년 시즌1으로 보여준 ‘더 존’의 버티기는 결코 쉽지 않았다. 한겨울 폐건물에서 4시간만 버티면 되는 미션에서는 여기 저기 출몰하는 눈동자들과 마주치면 뿌려지는 물폭탄 세례 때문에 영하10도의 혹한에 벌벌 떨며 유재석은 좀체 하지 않던 욕을 쏟아냈고, 이광수는 “포기하시죠”를 입에 달았다. 그나마 두 사람을 다잡는 권유리의 활약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미션마다 주어진 버티기 상황은 혹독했다.
어찌 보면 출연자들을 특정 상황에 넣고 괴롭히는 예능처럼 보이지만 ‘더 존’은 여기에 남다른 의미를 부여했다. 그건 코로나19 상황을 통해 갈수록 혹독해지는 환경을 시뮬레이션한다는 의미다. 미션들은 그래서 모두 의미심장했다. 이상 기후가 불러온 극한의 추위나, 지구온난화의 문제를 담은 ‘수위를 지키는’ 미션, 나아가 좀비들의 공격 속에서 ‘인간성을 지키는’ 미션이 그랬다. 그건 코로나19를 포함해 전 지구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위기들을 은유하는 것들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엔데믹을 맞이한 현재 다시 돌아온 ‘더 존2’는 어떨까. 팬데믹을 벗어났으니 위기도 끝났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팬데믹은 환경 문제로 인해 생겨난 하나의 사태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잠잠해지고 삶이 팬데믹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왔다고 해도 환경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한, 우리의 삶은 위험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니 여전히 버티는 삶은 진행형이다. 그래서 ‘더 존2’에도 밀물이 들어와 점점 물이 차오르는 ‘풀등 모래섬에서의 탈출’ 같은 미션은 지구온난화로 인해 물이 잠겨가는 섬이 존재하는 기후 위기의 문제를 보다 스펙터클하게 보여준다. 여기에 ‘더 존2’는 기후 위기 이외에도 달라진 삶이 가져온 다양한 위기 상황들을 펼쳐놓았다. 카이스트에서 펼쳐진 ‘침대 위에서 버티기’ 미션이 그렇다. 이 미션은 인공지능 같은 새로운 기술 발전이 편리한 삶을 가능하게 했지만, 이로 인해 발생할 수도 있는 위험요소들을 예능적으로 풀어냈다.
‘더 존2’가 시즌1과 확연히 달라진 점은 스케일이 커졌다는 점인데, 이것 역시 엔데믹과 무관하지 않다. 즉 시즌1은 제작 당시 팬데믹 상황이었기 때문에 비대면을 추구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세트를 일일이 만들어 촬영하는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엔데믹 분위기 속에서 시즌2는 야외로 나가는 게 가능해졌고 그래서 전국 각지에 미션과 관련 있는 현장을 찾아내 그 곳에서 촬영할 수 있었다. ‘풀등 모래섬에서의 탈출’ 같은 미션은 그래서 헬기와 배를 타고 바다 한 가운데 있는 모래섬으로 들어가 실제로 무릎까지 차오르는 밀물 속에서 버텨내는 거대한 스케일을 보여줬다. ‘침대에서 버티기’ 미션 역시 카이스트 교정에서 무인으로 조종되는 수륙양용 침대차가 건물로 들어가거나 강으로 뛰어드는 놀라운 광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스케일과 극한의 상황들이 어떤 맥락을 갖지 못했다면 ‘더 존’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은 과연 시즌2로 돌아오는 ‘버티기’에 성공할 수 있었을까. 그건 자칫 가학과 자극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금기를 건드리면서도 ‘더 존’이 버티기에 성공할 수 있었던 건 ‘시대의 코드’로서 이른바 ‘존버’라 불리는 정서를 끌어왔고, 무엇보다 우리만이 아니라 전 세계인들이 모두 공감할 수 있는 기후 위기 같은 환경문제 등을 하나의 시뮬레이션으로 제시했기 때문이었다.
굳이 환경 문제 같은 거창한 전 지구적 위기를 꺼내놓지 않더라도 이제 ‘버티기’는 ‘존버’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우리 시대의 코드가 됐다. 일터나 학교 나아가 일상의 영역 어디서든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이제 거창한 성공은 차치하고 그저 끝까지 버텨낼 수 있기를 바라게 됐다. 그래서 이 시대를 읽어낸 ‘더 존2’의 존버는 그 자체로 의미가 깊다. 시대를 읽어내는 힘은 어쩌면 존버의 기본전제일 수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