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피해를 호소했으나 영화제 측의 대응은 싸늘하기만 했다. 성범죄를 ‘개인적인 일’로 치부, 피해자 지우기 논란에 휩싸였던 부산국제영화제 측이 성희롱·성추행 고발이 처음 있은 지 보름 만인 지난 15일 뒤늦게 고개를 숙였다.
관련 사건이 알려진 건 지난달 31일. 허문영 전 집행위원장은 지난달 9일 임시 이사회 및 총회가 열리자 이틀 뒤 사의를 표명했다가 영화제 측의 설득으로 복귀를 고려하고 있을 때였다. 허 전 집행위원장은 당시 이사회에서 공동위원장 직제가 신설되고 조종국 운영위원장이 위촉된 데 대한 불만의 표시로 사퇴 의사를 밝힌 것으로 추측됐다.
허 전 집행위원장의 복귀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오랜 기간 일했다는 A씨가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에 피해를 신고하면서 완전히 무산됐다. A씨는 영화제에서 일하는 최근 몇 년 간 허 전 집행위원장으로부터 성희롱성 발언과 부적절한 신체 접촉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허 전 집행위원장은 일간스포츠에 “100% 확신을 갖고 말한다. A 씨와 어떠한 신체 접촉도 없었다”고 강조하면서 “영화제 측에 사퇴의 뜻을 밝힌 건 A 씨의 주장과 무관하다. 내 심신의 능력이 고갈돼 더 이상 업무를 수행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사안이 워낙 중대하고 시간이 지난 일이다 보니 양측의 입장이 엇갈리는 건 예상 가능했던 일이다. 다만 이후 영화제 측의 대응은 사태를 바라보는 많은 대중을 실망시키기에 충분했다.
부산국제영화제 측은 같은 날 공식 입장을 내고 허문영 집행위원장의 개인 문제가 제대로 밝혀질 때까지 사표 수리를 보류하고 복귀를 기다리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틀 뒤에 다시 발표한 입장에서는 “허문영 집행위원장의 사표 처리는 본인의 의사를 존중해 수리한다”고 했다. 허 전 집행위원장을 향한 성폭력 피해가 고발됐음에도 영화제 측이 낸 두 번의 입장문 어디에도 피해자는 없었다.
일각에선 영화제 측의 이 같은 공식입장이 사건의 진상 규명을 피하기 위한 제스처 아니냐는 의혹까지 제기했다. 피해자를 지우는 듯한 미온적 태도가 영화제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결국 영화제 측은 “사건에 대한 신속한 조치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피해자 입장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발표가 있었던 것에 대해 뒤늦게나마 사과드린다”며 늑장대응을 인정했다. 또 직장 내 성폭력 사건을 개인의 문제로 표현한 것에 관해서도 “깊이 사과드린다. 향후 책임 있는 자세로 해당 사건은 물론 영화제 전 직원의 안전을 책임질 수 있도록 진상 규명·재발방지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거듭 사과했다.
문제는 단순히 사과가 늦었다는 데만 있지 않다. 한국영화성평등센터에까지 고발된 성폭력 피해 내용에 관한 늑장대응은 영화제 측이 관련 사안을 중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인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피해자가 수년 간 피해 사실을 함구해 왔다는 것은 이 같은 추측에 힘을 싣는다.
부산국제영화제가 입장에서 밝혔듯 사건의 진상 규명과 재발방지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게 진심이라면, 신속하고 진지하게 조사에 착수하고 대중이 납득할 수 있는 방지책을 내놔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