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서대문구청 여자농구단을 지휘하고 있는 박찬숙 감독은 20일 서울 중구 순화동 KG타워 지하 1층 하모니홀에서 열린 '2023 IS 스포츠마케팅 써밋 아카데미' 강연자로 나섰다.
1970~80년대 여자농구 최고 스타였던 박찬숙은 아직도 한국 여자농구를 대표하는 이름이다. 1979년 세계농구선수권대회 은메달,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여자농구 은메달 등 한국 농구의 가장 빛나는 성과를 올린 주인공이다.
박찬숙 감독은 자신의 농구인생을 능숙한 말솜씨로 소개했다. 그는 “숭의여고 시절 통금(통행금지)시간이 될때까지 야간 개인훈련을 했다. 여러분, 통금이 뭔지 아시나요?” “1984년 올림픽 때는 농구 룰에 3점 슛이 없었다. 2점만 있었다. 놀랍죠?”라며 ‘옛날 이야기’를 풀어갔다.
박찬숙 감독은 중학교 때 현재의 키인 1m88㎝까지 자랐다고 했다. 그는 “16세에 최연소로 대표팀에 뽑힌 건 키가 컸기 때문이었다. 농구 잘해서가 아니었다”고 웃으며 “하지만 키만 크고 농구 기술이 없는 선수가 되기는 싫었다. 중고교 시절 매일 몇 시간씩 개인훈련을 했다. 새벽에는 제일 먼저 학교 체육관 문을 열고 불도 켜지 않은 채 캄캄한 데서 드리블 연습을 하며 감각을 익혔다”고 회상했다.
그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인생 경기’는 역시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중국전이다. 당초 한국은 프레올림픽에서 본선행에 실패했으나, 소련(러시아)을 비롯한 동구권이 대회를 보이콧하면서 극적으로 본선에 올랐다.
무릎 부상으로 은퇴까지 고민하고 있던 박찬숙은 “비겁하지만, 그때는 도망치고 싶었다. 조승연 감독님이 대회에 나가자고 설득하는데 ‘나가봤자 꼴찌할 거잖아요’라며 거절했다”고 비하인드 스토리를 전했다. 그러나 조승연 감독이 “지금까지 쌓아온 박찬숙의 농구 인생이 이렇게 흐지부지 끝나는 게 상관 없으면 안 와도 상관없다. 마무리를 멋지게 하려는 도전은 네 선택이다”라는 말에 박찬숙의 가슴에 불이 붙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풀리그로 진행된 이 대회에서 한국의 풀리그 마지막 상대는 중국이었다. 이기면 은메달 확보, 지면 3-4위전으로 가야 하는 중요한 경기에서 박찬숙은 신들린 듯 공격을 주도했다.
그는 “중국에 진월방, 정하이샤라는 2m 넘는 센터가 둘 있었다. 이들을 나와 성정아가 샌드위치로 수비했다. 그리고 중국 선수들이 하프라인을 쉽게 넘지 못하도록 풀코트 프레스를 이어갔다. 중국이 거기서 크게 흔들렸다”며 “은메달에 감격한 선수들이 종료 버저가 울리기 전부터 모두 울었다”고 회상했다.
박찬숙 감독은 1985년 은퇴 후 결혼, 출산을 하며 3년간 코트를 떠났다. 1980년대는 여자 선수가 결혼하면 가정주부로 사는 게 당연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박찬숙은 그때부터 또 도전을 시작했다. 플레잉코치로 다시 대만무대와 한국 실업무대를 뛰었다. 이후 방송 리포터, 국가대표팀 코치, 한국여자프로농구연맹에서 행정가로도 활약했다.
박찬숙 감독은 “은퇴 후 여러 일을 이어가면서도 꿈은 늘 한 팀을 지도하는 감독이 되는 것이었다. 지금 서대문구청에서 아주 좋은 환경 속에 다시 한번 꿈을 이루고자 하는 어린 선수들과 함께 하는 게 너무나 행복하다”고 했다. 그는 “나는 영원한 농구인이다. 돌아보면 농구를 할 때도, 선수를 그만둔 후에도 늘 도전하면서 살았다. 여러분도 도전하는 자세로 나아가면 반드시 성취하는 게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