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망했어.’ 이른바 ‘이생망’ 정서에 담겨있는 건 체념과 포기다. 농담처럼 툭 던지는 이 말 속에는 제아무리 노력해도 바뀌지 않는 삶이 주는 무력감이 자리한다. 이른바 어떤 ‘수저’를 물고 나오느냐에 따라 그 미래가 결정되는 삶이 그것이다. 그래서 이른바 치열한 생존경쟁이 벌어지는 ‘노오력’ 사회로부터 절망감을 느끼는 이들의 정서가 바로 이 ‘이생망’에 담겨 있다.
그런데 바로 이 이생망 시대에 이 드라마는 제목부터 어딘가 불순(?)하다. tvN 토일드라마 ‘이번 생도 잘 부탁해’가 그 드라마다. ‘잘 부탁해’라는 말에는 ‘이생망’ 정서와는 거리가 먼 어떤 기대감을 넘어 설렘까지 느껴진다. 게다가 ‘이번 생은’이 아니라 ‘이번 생도’다. 지난 생도 나쁘지 않았다는 뉘앙스가 담겨있다. 도대체 무슨 긍정적인 시선이 이생망 정서로부터 한참 떨어진 이런 제목의 드라마에 드리워져 있는 걸까.
이제 19회차 인생을 사는 반지음(신혜선)은 모든 전생을 기억한다. 그러니 그가 삶에 어떤 애착이나 욕망, 나아가 꿈같은 걸 가질 리가 없다. 죽음이 끝이라는 인식이 결국은 삶에 대한 애착을 강하게 만드는 것일 텐데, 반지음은 죽은 후에도 자신이 환생할 걸 알고 있고 환생한 후에도 전생을 기억한다. 삶에 대단한 목표가 있을 리 없고, 태어난 김에 사는 그런 삶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에게 사건이 벌어진다. 18회차 인생에서 윤주원(김시아)으로 살아갈 때 만난 어린 서하(정현준)와의 사랑 때문이다. 이들은 어린 나이에 서로를 사랑하게 되지만 교통사고로 서하만 살아남고 윤주원은 사망하게 된다. 19회차 인생에서 환생한 어린 지음(박소이)은 살아서 청년이 된 서하(안보현)을 찾아 나서고 그의 주변을 맴돌며 성장해 서하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서하가 여전히 윤주원을 잊지 못하고 그 상처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반지음(신혜선)은 깨닫는다. 지금껏 매번 죽었다 환생하는 자신의 기구하고 슬픈 삶만을 생각했지만, 죽은 다음 남은 자들의 슬픔이 있었다는 것을. 그는 이번 생의 특별함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여러 번 사는 동안 나의 아픔만 선명했어. 이번 생은 달라. 내 죽음 뒤에 남겨진 사람들. 그들의 슬픔과 마주하게 되는 이상하고 신선한 열아홉 번째 내 인생.’
‘이번 생도 잘 부탁해’의 반지음이라는 문제적 인물이 전생을 기억한다는 설정은 여러 모로 이생망 정서의 시대에 ‘인생리셋’을 꿈꾸는 현 대중의 판타지가 들어있다. 이번 생은 망했어도 다음 생이 또 있다는 것. 하지만 여기에는 또 하나의 문제의식도 들어있다. 그렇게 생이 또 이어지고 다른 삶을 살 수 있다고 해도 그걸 무한 반복하는 삶에서 우리는 어떤 의미와 가치를 찾아낼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드라마는 무의미해 보이는 이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이 사랑이나 우정, 모성, 부성 같은 사람들이 마음을 주고받는 그 관계에 있다는 걸 보여준다. 전혀 의미 없어 보이던 반지음의 삶이 특별해지는 건 서하라는 인물에 대한 남다른 감정이 생겨나서고, 그가 가진 상처를 위로해주고 보듬어주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다.
‘이번 생도 잘 부탁해’는 반지음과 문서하의 전생과 현생을 뛰어넘는 멜로드라마지만 여기에만 머무르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환생 판타지 때문이다. 반지음은 이번 생에는 문서하보다 어린 나이에 여성으로 태어났지만, 18회차 인생에서는 문서하보다 나이 많은 윤주원으로 살았다. 또 17회차 인생에서는 서커스단의 단원이었던 김중호라는 남자로 살았는데 당시 형 내외의 남겨진 딸이었던 김애경을 돌봐준다. 그래서 19회차 인생에 환생한 어린 지음은 바로 그 나이 지긋한 김애경을 찾아가 자신을 증명하고 그래서 그에게 ‘삼촌’이라 불리는 기묘한 관계가 만들어진다. 즉 환생 판타지는 나이도 성별도 뛰어넘는 새로운 세계를 열어 놓은 것이다.
바로 이 점은 ‘이번 생도 잘 부탁해’가 남녀 간의 사랑이야기를 보여주고 있지만, 실은 인간 대 인간의 사랑, 우정 같은 관계를 그려내는 휴먼드라마로 확장되는 요인이 된다. ‘이번 생은 망했어’라고 농담 섞인 말로 하루하루를 버텨나가는 모든 이들에게 이 드라마가 던지는 응원과 위로는 그래서 크게 다가온다. 다음 생이 또 있다 해도 그것이 의미 있어지는 건 결국 특별한 누군가와의 관계나 순간이라는 이야기를 건네고 있어서다. 아마도 바로 이번 생에 당신 옆에 있는 그 누군가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