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무엇을 할진 저도 몰라요. 인생은 훈련이고, 경험이에요. 주어진대로 하는 게 삶 아닐까요.”
1990년대초 여자 솔로 가수로서 이름을 날렸던 신수경의 말이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한 곳에 얽메어놓지 않고 흘러가는대로 몸을 맡겼다. 그러다 보니 인생 제2막을 냉면집 사장으로 살게 됐다. 어찌 보면 그는 원조 ‘도전의 아이콘’이 아니었을까.
신수경은 현재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에 위치한 한 냉면집에서 6년째 사장으로 일을 하고 있다. 남편인 닥터 레게 리더 김장윤과 함께 식당을 운영 중인 신수경은 인터뷰 날에도 바쁜 모습으로 기자를 만났다. 오후 점심 시간대에 몰릴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해 오전부터 출근해 식당 구석구석을 손수 정리하고 직원들과 함께 음식을 준비했다.
신수경은 최근 SBS 예능 프로그램 ‘런닝맨’에 우연히 얼굴을 비치며 그를 기다린 팬들에게 단비같은 순간을 짧게나마 선사했다. 여전히 아름다운 미모와 눈웃음은 남성 팬들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신수경은 최근 기운이 남다르다고 말했다. 그는 “‘런닝맨’ 방송 한 달 전쯤 한 남성 분이 식당에 와서 거의 밥을 드시지 못하더니 계산할 때즈음 내게 와 팬이라고 말했다. 뜯지도 않은 내 옛 앨범 CD를 갖고 멀리서 찾아 오신 것”이라며 “수줍고 떨린 모습으로 말을 거는 모습에 옛 추억이 새록새록 났다”고 낯선 경험에 옅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신수경은 1990년대 초 가수로 활약하며 인기를 끌었다. 1993년 발표한 데뷔곡 ‘아직 어린 나’, 1994년 내놓은 리메이크곡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 등으로 짧은 활동 기간에도 확실한 존재감을 대중에게 심었다.
신수경 1집 앨범 커버, 밴드 ‘보니카’ 멤버 시절. (사진 = IS포토) ◇ 꿈과 현실 사이 고민했던 ‘인생 1막’
신수경은 21세라는 어린 나이 가수로 데뷔했다. 당시만 해도 연예계에는 규제가 많았다. 신수경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음악은 하고 싶은데 당시 방송계에서 가수로서 설 자리가 거의 없었다. 신인가수로서 오롯이 내 노래를 할 곳이 없었다”며 “한 번은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신인가수 수십명을 불러 놓고 각자 홍보, 소개할 수 있는 시간을 30초씩 줬다. 원래 얌전한 이미지였는데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개인기도 하고 평소 나답지 않은 모습을 보여줬다”"고 쉽지 않았던 데뷔 시절을 떠올렸다.
신수경은 가수로서 열정만큼은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였다. 스스로 각종 오디션에 도전하는 것은 물론, 복수의 연예 잡지에 직접 자신의 홍보 자료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다 어렵게 ‘원기획’이라는 회사 소속 아티스트가 됐다. 신수경은 “생각과 다른 가수 생활에 혼란이 왔다”고 말했다.
신수경은 “나는 자유로운 가수 생활을 하고 싶었다. 내 목소리를 들려주고 내 노래를 하고 싶었는데 그것보다 회사가 추구하는 음악에 맞춰 앨범을 준비하고 활동하는 면이 존재했다”며 뜻대로 펼쳐지지 않는 시간이었음을 전했다.
그러면서 신수경은 “이렇게는 음악을 하기 싫었다. 내가 원하는 음악을 하고 싶었고 더 나아가 나 자신을 찾는 시간이 필요했다”며 “내가 잘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계속 들었다”고 말했다. 신수경은 20대 시절에 대해 “내 음악, 나를 찾고 싶어했던 시기였다. 성공보다는 나 자신의 존재를 중요시 여기며 살았던 시절”이라고 말했다. 1997년 신수경은 영국으로 음악 유학을 떠나 4년여 동안 현지 밴드 ‘보니카’ 멤버로 음악의 길을 걸었다.
이후 신수경은 한국으로 돌아와 모임에서 가까워지게 된 김장윤과 결혼했고 가수 활동을 잠시 접어두게 됐다. 두 사람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마음이 맞아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다. ◇‘인생 2막’에도 마음은 여전히 음악에
“사실 이 가게를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았을 때 여러 생각들이 들었어요.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이게 맞는건가. 난 노래하고 싶고 뭔가 더 표출하고 싶은 음악의 끼들이 많은데….”
신수경의 인터뷰를 듣고 있던 냉면집의 또 다른 사장님, 남편 김장윤이 한 말이다. 김장윤은 “나와 아내 둘다 식당 운영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걱정을 많이 했다. 하지만 불현듯 늦게라도 부모님을 위해 효도하자는 마음에 식당을 물려받아 최선을 다해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신수경은 이런 김장윤의 모습에 “정말 열심히 일한다. 거의 쉬지 않고 일하다 보니 건강도 사실 안 좋다. 허리를 아파하는 모습에 쉬라고 해도 잘 안 쉰다”이라며 “남편은 책임감이 강하고 참 멋진 사람”이라고 애정을 드러냈다.
인터뷰 내내 식당 한 구석에서는 조용히 음악이 흘러 나왔다. 식당 입구 쪽에 마련해 운영 중인 간이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신수경은 “아직도 우린 음악에 대한 열정과 생각들이 많다. 써놓은 곡들도 많아서 언제든 새로운 음악을 발표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장윤도 1993년 12월 발표한 ‘어려워 정말’이라는 곡으로 당시 음반 판매량 3위, KBS 대표 음악순위 프로그램 ‘가요톱10’ 2위 등 큰 인기를 누렸던 가수였다. 그는 “식당 운영에 대한 마음이 좀처럼 정립되지 않아서 한동안 애를 먹었다. 그러다 ‘나는 여기의 가수고 직원들은 무대 스태프다. 그리고 식당을 찾는 손님들은 내 공연의 관객이다’라고 생각하기로 했다”며 “그랬더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때부터 일에 집중하게 됐다”고 털어놨다.
이렇듯 두 사람은 ‘냉면집 사장’으로서 6년을 보냄과 동시에 음악도 빼놓지 않은 삶을 살고 있었다. 식당 일과 더불어 이들은 여러 활동을 통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다. 교회 예배 시 찬양은 물론, 어르신 봉사 활동 등 각 지역에서 진행하는 소규모의 행사에도 종종 참석하며 노래를 부르고 있다. 신수경은 “식당일로 고된 것들을 노래로 풀려고 한다. 조금 일찍 퇴근하거나 주말에는 주부들도 음악으로 교류할 수 있는 모임에서 노래하고 있다”며 “끼 있는 분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음악에 대한 열정과 꿈은 결코 놓지 않으려 한다”고 말했다.
냉면집 사장으로서 힘겨운 일들이 많지만 그것마저도 음악과 접목해 헤쳐 나가고 있는 신수경과 김장윤 부부다. 신수경은 “지금 보면 내가 인생을 참 다양하게 살아온 것 같다. 그냥 지나간 인생이 아닌 것 같고 가수였던 삶도 이번 방송 출연을 통해 다시 한 번 느끼게 해줘서 좋았던 것 같다”며 “지금 내게 주어진 시간과 일들에 대해 특별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겠다고 다짐했다”고 진심을 전했다.
“식당 일을 하는게 6년을 넘어 앞으로 16년, 26년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다른 일을 할 수도, 일을 안할 수도 있는 게 인생이잖아요.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에 집중하며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게 중요하죠. 지금 우리는 ‘인생 2막’의 초반인 냉면집을 운영하고 있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