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해태 타이거즈에는 선동열, 롯데 자이언츠에는 최동원, 삼성 라이온즈에는 김시진이 있었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팀 역사에 남은 '초대 에이스'다. KT 위즈팬들에게도 그런 존재가 있다. 바로 사이드암스로 고영표(31)다.
고영표는 지난 6일 잠실 두산 베어스전에서 7이닝 6피안타 1볼넷 5탈삼진 1실점으로 호투했다. KT가 3-1로 승리하면서 고영표는 시즌 10승(5패)을 달성했다. 지난 2021년 이후 이어온 3년 연속 두 자릿수 승수였고, KT 창단 후 최초로 이뤄낸 기록이었다.
20대 때만 해도 고영표는 불운의 상징이었다. 2018년까지 4시즌 동안 평균자책점은 5.26이었다. 이 기간 FIP(수비 무관 평균자책점)는 4.12(스탯티즈 기준)로 크게 낮았다. 두 지표 차이가 신인 시절 1.82에 달했다. 선발 투수로 자리 잡은 2017년 역시 두 기록의 차이가 1.2(140이닝 이상 투수 중 1위)나 됐다. 고영표가 땅볼을 유도해도 약체였던 KT 내야진이 잡아주지 못했다.
고영표가 2021년 공익근무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환경이 180도 달라졌다. 이강철 감독 부임 후 수비와 투수력이 견고해져 통합 우승을 노리는 강팀으로 변모했다. 고영표는 그해 11승 6패 평균자책점 2.92를 기록하고 창단 첫 통합 우승을 이끌었다. 든든한 동료들 덕분에 FIP(3.19)보다 0.28이 낮은 평균자책점을 남겼다.
2021년 본지 프로야구대상 시상식에서 최고투수상을 받은 고영표는 "복귀했을 때 이전의 암흑기 기운을 (팀에) 가져오면 어떡하나 생각하면서 몸을 열심히 만들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드디어 실력에 맞는 성적표를 받은 것이다.
소집 해제 후 고영표는 2년 연속 퀄리티스타트(QS·선발 6이닝 이상 3자책점 이하) 21회를 달성, QS의 상징이 됐다. 여기에 3년 연속 10승을 달성하며 자타공인 KT의 '초대 에이스'로 자리매김했다. 고영표는 7일 경기 후 "기록을 크게 의식하진 않았고, 좋은 피칭을 하면 승은 따라온다고 생각했다. 기록을 달성하게 돼 기분 좋고, 동료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고 공을 돌렸다.
첫 기록에 들뜨지 않는다. 여전히 목표는 QS다. 고영표는 "(개인 승리과 달리) QS 기록은 의식한다. 항상 그게 내 임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고영표는 이날 호투로 최근 10경기 연속 QS, 5경기 연속 퀄리티스타트 플러스(QS+·선발 7이닝 이상 3자책점 이하)를 이뤘다. 시즌 QS 횟수가 16회인데 이 가운데 무려 14회가 QS+다. 그는 "올해도 QS 20회 이상을 하고 싶다. QS+도 16개 이상 해보고 싶다"고 했다.
선동열의 존재가 '투수 왕국' 타이거즈로 이어졌듯 고영표의 존재도 '선발 왕국' KT의 근간이 됐다. 지난 5월 최하위까지 떨어졌던 KT는 7일 기준으로 3위와 승차 없는 4위(승률 0.527)까지 올라섰다. KT 저력의 기반은 올여름 되살아난 선발진에 있다. 6월 이후 KT의 선발 평균자책점 3.19로 1위이고, 특히 8월에는 평균자책점 2.49로 리그를 압도하고 있다.
고영표는 "도망가지 않고 공격적으로 피칭하자는 분위기가 후배들 사이에 조성됐다. 그런 부분에서 (내가) 영향을 끼친 게 아닌가 싶다"며 "앞 차례 선발이 잘 던지면 나도 잘해야겠다는 분위기다. 6이닝을 던지지 못하면 못 던진 게 된다. 후배들은 '형이 그렇게 만들어놨다'고 얘기한다. 좋은 시너지 효과 같다. 투수들이 최대한 적은 투구 수로 긴 이닝을 먹어주면(던져주면) KT가 계속 올라가지 않을까"라고 기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