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매력은 작품 안에서 이야기가 끝나지 않고 확장된다는 점 아닐까요. 좋은 영화 한 편이 촉발한 감상과 의미를 다른 분야의 예술과 접목해 풀어보고자 합니다. ‘환승연예’는 영화, 음악, 도서, 미술 등 대중예술의 여러 분야를 경계 없이 넘나들며 이야기하는 코너입니다.
한 남자가 있다. 이름은 푸구이. 지주집의 아들로 태어난 푸구이는 이름처럼 부유하고 귀하게 자랐다.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말처럼 타고 다닐 정도로 세상이 우습다.
그런 그의 삶에도 위기가 닥친다. 노름판에서 전재산을 잃은 푸구이는 그때부터 인생의 무서움을 알게 된다. 살아 있는 동안 푸구이는 문화대혁명, 대약진운동 등 중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몸으로 겪었고, 평생을 가족을 위해 헌신한 아내를 비롯헤 가족들이 한 명, 한 명 세상을 떠나는 것을 목격해야 했다.
가졌던 모든 것을 잃고 아내, 딸, 사위, 손자까지 모두 떠나는 것을 그저 바라보고 있어야만 할 때의 심경이란 얼마나 절망스러울까. 절대자가 예고도 없이 던지는 풍파 속에서 그저 버티고 살아가는 한 남자의 인생. 중국 문학계의 거목 위화가 쓴 소설 ‘인생’은 장이머우 감독의 손에서 1995년 영화로 탄생하기도 했다.
푸구이의 삶이 지나치게 극적인가. ‘설마 저 정도로 비극이 몰아치는 인간이 어딨느냐’는 생각이 든다면 뮤지컬 ‘프리다’ 관람을 추천한다. 멕시코의 화가 프리다 칼로의 생애를 다룬 이 작품을 통해 50년이 채 되지 않은 삶 속에서 한 인간이 얼마나 갖은 고통을 다 당할 수 있는지 알게 될 테니 말이다.
프리다 칼로의 인생은 그야말로 장애물의 연속이었다. 어릴 때는 소아마비를 앓았고, 꿈 많은 캠퍼스 라이프를 그리던 10대 후반에는 척추를 으스러뜨린 교통사고를 겪었다. 사고를 목격한 연인은 프리다 칼로의 곁을 떠나고, 어떻게든 연인을 잡아보려 몸에서 유일하게 움직여지는 오른손으로 쓴 편지는 차갑게 버려진다. 침대 위에서 오로지 오른팔만 움직일 수 있는 상태로 보낸 시간이 9개월. 그는 그 팔과 손으로 실연과 육체적 고통이 안기는 절망 속에 있는 자신의 얼굴을 그렸다. 그것이 프리다 칼로의 첫 작품이다.
그 후에도 프리다 칼로의 고통은 끝나지 않는다. 사랑을 맹세했던 남자 디에고 리베라는 결혼 후에도 계속된 여성편력을 보이고, 기어이 칼로의 여동생하고까지 잠을 잔다. 희망처럼 품고 있던 뱃속의 아이는 유산되고,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난다. 마치 홀로 남겨진 것 같은 순간에도 고통은 멈추질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다리가 썩어들어가기 시작한 것. 절단하지 않으면 생명을 보존할 수 없다.
‘인생’의 중국어 원제는 ‘활착’이다. 활착이란 씨앗이 바람에 나부끼다 떨어진 곳에서 그대로 싹을 틔우고 살아간다는 의미다. 삶이란 자신이 싹을 틔울 곳을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아닌, 시간이 이끄는대로 흘러가며 그저 자신에게 주어지는 눈과 비와 바람을 견디는 것이라는 것. 그것이 아마 위화의 인생관이었나 보다.
‘프리다’에서 프리다는 척추가 부서진 뒤에도 살기로 결심한 자신에게 데스티노가 “하지만 삶은 너에게 좋은 것만 주지는 않을 거야”라고 하자 “나도 알아. 굿바이 키스를 보낼게”라고 답한다. “괜찮아 달라질 뿐 사라진 건 아니니까. 더 굳세게 더 강하게 내게 갑옷을 줘. 화살을 견딜 총알을 견딜 내게 갑옷을 줘”라는 그는 그 순간 운명이란 피할 수 없는 것이며 그저 견뎌야하는 것임을 깨달았을 것이다. 견디는 삶. 자신이 당도한 그곳에서 끈질기게 싹을 틔우고 생을 유지하는 삶이란 얼마나 처절하고 또 찬란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