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 선생님과 인연이 있습니다. 첫 번째 직장을 다닐 때입니다. 매달 한 번씩 그 분을 뵈러 가게 됐습니다. 사회적 이슈에 대한 당신의 진단과 우리 사회에 필요한 어젠다를 말씀해 주시면 보고서로 정리하는 것이 제 일이었습니다. 자료는 회사 최고 경영진에 전달됐고, 주요 간부들이 살핀 뒤 기획으로 발전시키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선생님 말씀이 끊어지지 않게 저는 녹음기와 공책을 들고 갔습니다. 노트북 컴퓨터로 받아치려니 자판기 소리가 방해될까 신경 쓰였습니다. 한두 시간 동안 빼곡히 적고 나면 팔이 뻐근해 지곤 했습니다. 새로운 통찰과 발제도 흥미로웠지만 선생님이 세상사와 사물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알게 된 것이 더 큰 배움이었습니다. 그 분이 가진 생각의 방법론입니다.
트리비아 (trivia).
사소하고 작은 것이란 뜻입니다. 이것이 선생님이 세상을 탐색하는 방법입니다. 이어령의 트리비아는 마치 원자 속에 들어있는 우주 같습니다. “모든 것에 대해 무언가를 알고, 무언가에 대해 모든 것을 아는 것!”이라고 그는 설명합니다. "사소하거나 단순한 것의 디테일을 파고 들면 지식과 정보를 넘어 세상의 이치와 연결된다"는 말씀을 잊지 않고 당부하시곤 했습니다. 무비판적으로 수용되는 개념과 표현들에 때론 분노하고, 무지한 단어 선택과 얕은 지식의 시대에 우울해 하시던 모습도 기억납니다.
선생님은 동물 세계를 관찰한 연구를 즐겨 인용했습니다. 그의 강연, 저서에 자주 나오는 퍼스트 펭귄(the first penguin) 이야기도 그 중 하나입니다. 먹이를 찾아 바다로 뛰어들려는 펭귄 무리와 그 앞에 진을 친 바다사자. 머뭇거리는 펭귄들 앞으로 퍼스트 펭귄이 먼저 점프합니다. 불확실한 미래에 용기 갖고 덤벼 보라는 메시지입니다. 첫 번째 먹잇감이 될 위험을 감수하고 나머지를 천적의 시선에서 돌려 자신은 희생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제가 이어령 선생님께 들은 이야기는 거기서 더 발전합니다. 세컨드 펭귄(the second penguin)에 초점을 맞춥니다. 퍼스트 펭귄이 리드하는 것 같지만 그 장면을 천천히 돌려보면 대부분 펭귄은 여전히 주저합니다. 그런데 두 번째 펭귄이 퍼스트 펭귄을 뒤따라 뛰어들자 무리 전체가 우르르 쏟아집니다. 세컨드 펭귄 이야기, 어떤 생각이 드세요?
세컨드 펭귄이 없었다면 퍼스트 펭귄의 도전, 또는 희생도 그냥 묻혔을지 모릅니다. 퍼스트 펭귄 혼자 뛰어 들었다가는 단박에 천적의 표적이 됐을 겁니다. 단체나 조직에서 리더 혼자 독불장군이 돼선 다수가 움직이지 않습니다. 리더가 좋은 의도를 갖고 '나를 따르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들 처음엔 반신반의하거나 두려워합니다. 진심으로 따르지 않는 경우를 더 많이 보지 않습니까. 세컨드 펭귄은 퍼스트 펭귄에게 진짜 필요한 원군입니다. 다수의 마음을 끌어 오고 리더와 연결시키는 중요한 고리가 세컨드 펭귄입니다.
세컨드 펭귄을 떠올린 건 몇몇 스포츠팀의 수석 코치 뉴스와 겹쳤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즌 프리미어리그의 절대강자 맨시티가 새 시즌을 맞아 후안마 릴로를 수석 코치로 복귀시킵니다. 릴로는 명장 펩 과르디올라의 전술 기초를 닦은 사람입니다. 20여 년 전 은퇴 직전의 과르디올라를 데리고 있던 스승입니다. 과르디올라 감독은 "나는 감정을 너무 많이 드러내는 사람이다. 나를 차분하게 해주고 상황을 더 잘 읽게 해준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해준다"고 평가할 정도입니다. 선수단 일부가 물갈이 된 맨시티가 다시 자리 잡는데 릴로 수석의 역할을 기대하는 목소리가 이어집니다.
한국 프로야구에선 삼성의 이병규 수석 코치가 베테랑 강민호 선수에게 멱살 잡힌 장면이 화제가 됐습니다. 팀의 역전 상황에서 벌어진 최고참 선수의 격의 없는 행동과 화통하게 웃고 받아주는 이 수석의 모습은 한때 경직된 삼성 벤치의 분위기가 바뀌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 주변엔 이인자, 넘버 투, 또는 여러 이름으로 수많은 세컨드 펭귄이 존재합니다. 대통령의 장관들, CEO를 보좌하는 기업 임원들, 부서장 휘하의 팀장들-. 누군가는 직함으로, 누군가는 그림자처럼, 누군가는 텐트를 떠받치는 기둥으로 자리를 지킵니다.
여러분의 퍼스트 펭귄과 세컨드 펭귄은 어떤 관계인가요. 뒤에서 지켜보는 무리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있나요.
한국코치협회 인증코치 김종문
김종문은 중앙일보 기자 출신으로, 2011~2021년 NC 다이노스 야구단 프런트로 활동했다. 2018년 말 '꼴찌'팀 단장을 맡아 2년 뒤 창단 첫 우승팀으로 이끌었다. 현재 한국코치협회 인증코치(KPC)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