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설(讀說). 읽고 말한다는 의미입니다. ‘정진영의 독설’은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사안을 한 번 더 깊게 들여다보고 기사로 푸는 코너입니다. <편집자 주>
대학 시절 술을 진탕 마시고 들어온 자취방에서 평소라면 절대 선택하지 않았을 영화 한 편을 봤다. 정확하게는 틀어둔 TV에서 그 영화가 나오고 있었다고 해야겠다. 그 영화는 할리우드 고어 영화계의 클래식으로 분류되는 일라이 로스 감독의 ‘호스텔’이다. 그로부터 15년이 흘렀지만, 아쉽게도 슬로바키아라는 나라에 대해 아는 건 여전히 ‘호스텔’ 속 그것뿐이다.
영화는 슬로바키아로 여행을 떠난 관광객들이 살인을 취미 삼는 집단에 납치를 당해 잔혹한 고문 끝에 죽임을 당한다는 내용이다. 인기에 힘입어 후속편까지 제작됐으니 영화를 향한 관심을 짐작할만하다. 문제는 이 영화 때문에 슬로바키아라는 나라의 이미지가 적잖이 훼손됐다는 점이다. 슬로바키아를 실제로 가본 적이 없고 뚜렷한 이미지도 없는 관객들에게 ‘호스텔’은 슬로바키아, 나아가 동유럽 국가들의 치안에 대한 불신을 심어줬다. 실제 당시 슬로바키아 정부는 제작사 측에 관련한 항의를 하기도 했으나 영화에는 반영되지 않았다.
비슷한 일이 최근 국내에서도 일어났다. 18토막이 난 시체 10구가 시간 간격을 두고 발견됐다는 허구의 괴담을 바탕으로 한 영화 ‘치악산’이 그것이다. 원주시가 정식으로 영화 제작사에 제목 및 영화에 등장하는 ‘치악산’이라는 지명 삭제 및 묵음 처리 등을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시는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포함한 법적 대응 카드까지 빼들었다.
사실 처음부터 원주시가 강경 대응 입장을 보인 건 아니었다. 본격적으로 양측의 신경전에 불을 붙인 건 지난 17일 김선웅 감독이 자신의 SNS에 게재했던 비공식 포스터다. 이 포스터는 한 산에 토막 난 사체가 널브러진 이미지를 담고 있었다.
김 감독은 “논란이 됐던 포스터는 공식 포스터가 아닌 해외 슬래셔 및 공포 장르의 영화제를 겨냥해 개인적으로 제작한 시안이었다. 개인 SNS에 공식 포스터가 아님을 공지해 게시했지만 몇몇 커뮤니티에 게시물이 공유, 확산되는 과정에서 공식 포스터로 인식됐다”고 사과하면서 포스터를 황급히 삭제했다.
논란은 쉽게 식지 않았다. 영화에 대한 관심을 끌어올리려는 노이즈 마케팅이 아니었느냐는 의심의 눈초리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실제 ‘치악산’ 측은 원주시와 협상 관련 내용과 대응을 보도자료로 배포해 영화에 대한 관심을 끌어올렸다.
이에 원주시 측은 “회의 석상에서는 시의 제안을 수용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다가 뒤돌아서서 이를 마케팅에 활용하는 행태를 보면 협상의 진정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태도에 강한 유감을 표한다”고 반발했다.
비슷한 논란은 영화 ‘곡성’과 ‘곤지암’ 때도 있었다. 곡성시는 다른 지역임을 확실히 하기 위해 ‘곡성’의 한자 표기를 병기하도록 하는 것으로 영화사 측과 합의를 봤고, 유근기 당시 곡성군수가 “우려를 뒤집어 생각하면 기회의 순간이 온다. 영화 ‘곡성’의 개봉을 막을 수 없다면 곡성을 모르는 분들에게 영화에 대한 관심을 높여 곡성을 찾아오게 하는 것이 남는 장사”라는 역발상으로 영화 ‘곡성’을 지역 인지도 상승에 활용했다.
인터넷에 널리 퍼진 곤지암 남양정신병원 괴담을 소재로 한 ‘곤지암’은 실제 토지 소유주가 매각에 어려움이 있다며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으나 법원에서 이를 기각해 결국 개봉됐다. 여전히 일부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는 ‘곤지암’이 지역에 흉흉한 이미지를 덧씌운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무대를 해외로 넓히면 베트남으로 향한 한국인 범죄자가 자국민을 대상으로 납치, 살인 등 중범죄를 저지른다는 내용의 ‘범죄도시2’는 베트남에서 상영금지 됐고, 남미 국가 수리남에서 ‘마약왕’이라 불렸던 조봉행의 실화를 다룬 작품 ‘수리남’은 수리남 정부로부터 항의를 받았다.
국내에서만 주로 콘텐츠가 유통되고 소비되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콘텐츠가 넘을 수 있는 국경의 벽이 한층 낮아졌다. 이는 창작자들이 어떠한 지역과 문화를 표현함에 있어 더욱 섬세하고 예민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예술과 표현의 자유는 보장돼야 한다. 다만 수많은 나라의 수많은 대중에게 전송될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책임감은 필요하다. 창작을 위해 부득이하게 특정 지역의 이미지가 훼손되거나 대중의 불안심리가 커질 우려가 있다면 이를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대중문화 창작자로서의 의무다. 최근 사회적으로 칼부림 등 흉흉한 사건이 연이어 발생해 시민들의 불안심리가 높아진 상황에서 산에 토막 시신이 널브러져 있는 포스터를 감독이 직접 SNS에 게재한 것이 과연 적절했을까. 괴담이 이미 많이 퍼졌던 ‘곤지암’과 달리 ‘치악산’은 괴담이 있었다는 사실조차도 이번 논란으로 처음 알게 됐다는 사람이 많다. 실제 사건이 아닌 것은 물론이다. 논란과 불안을 잠재우긴 커녕 오히려 부추긴 ‘치악산’이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