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9월 4일은 태권도의 날이다. 태권도가 올림픽 정식종목 채택된 날을 기념해 정부가 이날을 법정기념일로 제정했다.
태권도는 전 세계를 통틀어 세계화에 가장 성공한 무술이다. 2023년 9월 기준으로 세계태권도연맹(WTF)에 가입한 회원국은 213개나 된다. 국제축구연맹(FIFA) 회원국(211개국)보다 많다. 정확한 집계가 이뤄진 것은 아니지만, 세계 태권도 수련 인구는 2억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태권도는 오늘날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K-컬쳐의 시초다. 그 중심에는 1960년대부터 해외에 진출해 태권도를 보급한 사범들의 공이 컸다. 지금까지 정부 또는 민간 차원에서 해외에 파견된 태권도 사범들은 약 4000여 명에 달한다.
고(故) 고의민(1942~2023) 사범과 고(故) 박선재(1938~2016) 사범도 태권도를 세계에 알리고 발전시킨 자랑스러운 태권도인들이다. 고 사범과 박 사범은 올해 태권도 날을 맞아 태권도진흥재단이 선정한 '2023년 태권도를 빛낸 사람들’에 헌액됐다.
1942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난 고 사범은 태권도 경기 기술 발전을 이끈 선구자로 인정받는다. 1972년 국기원 개원과 1973년 WTF 창설을 이끈 그는 1978년 독일로 건너가 오스트리아, 폴란드, 벨기에 등 유럽 지역의 태권도 보급에 앞장섰다. 이후 WTF 기술위원회 부위원장 및 위원장과 국기원 자문위원을 역임했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 태권도 경기 기술대표로도 활동했다.
박 사범은 이탈리아 태권도의 아버지로 불린다. 1967년부터 1980년대 초까지 이탈리아 나폴리 동양대학원에서 한국어 원어민 강사를 하면서 태권도를 가르쳤다. 이탈리아 태권도협회 창립을 이끌고 태권도를 보급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4년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외국인으로는 이례적으로 기사 작위를 받았다.
이들이 처음 해외에 나갔을 당시 태권도는 현지인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무술이었다. 중국 쿵푸나 일본 가라데로 오해받았다. 아시아인에 대한 차별과 편견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래도 이들은 고개 숙이지 않았다. 태권도인의 명예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
전라북도 무주군 태권도원에서 열린 태권도의 날 행사에서 그들의 가족을 만나 삶의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현재 독일에서 태권도 사범으로 활동 중인 고 사범의 아들 고영재 씨는 아버지를 이렇게 떠올렸다.
"한국에서 태권도 국가대표 코치였던 아버지는 원래 2년 후 돌아올 계획으로 독일에 가셨어요. 그런데 독일에서 현지 파트너에게 사기를 당했습니다. 독일 말과 문화를 잘 모르다 보니 그냥 당할 수밖에 없었죠. 아버지는 그 시련을 겪은 뒤 오히려 더 머물러야겠다고 다짐하고 아예 독일에 정착했습니다. 그게 벌써 40여 년 전입니다."
고영재 씨의 어릴 적 기억 속 아버지는 주말마다 여행을 다녔다. 독일은 물론 유럽 다른 나라를 돌면서 태권도 강습 및 시범을 했다. 태권도를 가르쳐달라는 요청이 유럽 각 지역에서 끊이지 않았다. 그의 삶이 태권도였고, 태권도가 그의 삶이었다. 처음에는 그런 아버지를 원망했지만 철이 들면서 이해했다. 지금은 아버지를 따라 태권도인의 삶을 살고 있다.
"아버지는 노년에도 태권도 수업을 직접 하셨습니다. 특히 처음 태권도를 배우는 흰띠 수업은 다른 사범에게 맡기지 않고 꼭 본인이 가르쳤습니다. 태권도를 처음 시작할 때 기본을 잘 배워야 한다는 것이 아버지의 굳은 신념이었습니다."
박 사범의 딸인 박미영 씨도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박 씨는 아버지를 '가족보다 태권도 가족을 더 사랑했던 분'이라고 떠올렸다.
"어릴 때 주말이나 명절이 되면 늘 모임이 집에서 열렸어요. 제자들을 초대해 함께 식사하고 얘기를 나눴죠. 대화를 나누면서 태권도 정신과 한국 문화를 알리고 싶어 하셨어요. 처음에 태권도에 관심이 없던 이탈리아 사람들도 아버지의 진심을 이해했고, 자연스럽게 태권도에 빠졌던 것 같습니다."
박미영 씨는 지금은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떠올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는 태권도를 위해 사신 분입니다. 태권도를 너무 사랑하셨고 태권도에 모든 것을 바치셨죠. 마지막 순간까지도 태권도와 관련된 활동을 하셨어요. 그런 아버지가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고 사범의 부인인 김석순 씨는 헌액식 내내 눈물을 흘렸다. 그는 올해 세상을 떠난 남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남편은 정신과 행동 모두 태권도 그 자체였습니다. 태권도를 위해 태어난 사람이고 태권도를 너무 사랑했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태권도인으로서 명예와 자존심을 지키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깔끔하게 정직한 모습으로 평생을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합니다."ㅌ